생명공학 분야의 살아있는 역사,
Biotopia(생명사회)를 꿈꾸는 생명공학자
한문희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초대원장
한국 생명공학의 대부
바이오 벤처를 창업하며 바이오산업의 발전을 주도
생명과학기술 분야의 정책 확립에 기여
한문희 박사는 생물학을 공부하고 효소에 대해 연구하면서 최첨단 분야인 생명공학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한 1957년은 물론이고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1970년대에도 국내에서 생명공학이라는 분야는 생소한 분야였다. 1974년 KIST 유치과학자로 귀국한 그는 응용생화학연구실을 개설하고 효소를 비롯한 생명과학적 원리들을 산업적으로 응용하는 연구에 집중했다. 이후 생명공학 연구 개발의 성과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79년도에 비로소 ‘생명공학 연구부’를 신설할 수 있었다. 이후 국가 연구개발 역량의 지속적 확장을 위해 ‘유전공학센터’를 거쳐 오늘날의 ‘생명공학연구원’으로 발전해오는 동안 그가 기울여온 노력은 헌신이라고 불려도 될 만큼 각별했다.
생명공학 분야의 허허벌판에서 그는 유전공학센터장을 맡아 장기적인 발전계획을 세우고 실천해나가며 새로운 세상을 쌓아갔다. 유전자 재조합기술, 세포융합기술, 핵치환기술 등 유전공학의 핵심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해외 전문가를 초청해 기술전수를 하도록 했고, 저변 확대를 위해 국내에 기술을 전파해 나갔다. 또 기술인력 확보를 위해서 인력양성 시스템을 도입하고 지원 인프라를 적극 구축해 나갔다. 동시에 원당 수입을 대체하기 위한 전분당 연구개발 사업, 원료 의약품 수입 대체를 위한 항결핵제 연구개발 사업 등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당시 우리나라에 절박했던 기술을 개발하여 과학과 더불어 산업 발전에도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것이다. 또 1980년대에 5차 경제개발계획 수립과 함께 과학기술정책도 준비되고 있었는데, 그는 생명과학기술 분야의 새로운 정책 방향을 제시하며 생명과학 육성의 틀을 마련했다.
바이오 관련 전문가로서 도핑컨트롤센터 소장을 역임하며 88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지원한 것도 의미 있는 활동이었다. “이전 올림픽에서 분석해야 할 금기약물이 72종이었다면 서울올림픽에서는 100여종의 금기약물을 분석해야 하는 상황으로, 검사대상 약물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새로 늘어난 금기약물 대상은 베타-차단제와 이뇨제였는데 역대 올림픽에서 수행한 금기약물 분석방법이나 결과에 대하여 참고할 만한 기록이나 자료도 없는 상태였죠. 자체적으로 분석기술을 개발하고, 분석 장비를 구축하고, 기술 인력을 확보해 나가는 방식으로 독자적 기술역량을 확립했습니다.” 도핑컨트롤센터가 1987년 국제공인 시험에 합격하여 세계적으로 15번째 국제공인센터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올림픽 약물검사 지원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은 수년에 걸친 치밀한 준비 덕분이었다.
바이오벤처를 창업하고, 지금까지도 국내 바이오제약산업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는 한문희 박사. 생명공학 분야의 산업화 인프라와 정책을 구축하고 입안하며 유전공학 붐과 바이오벤처 붐의 신화를 창출한 그는 무에서 유를 창출한, 한국 생명공학 분야의 살아있는 역사가 되었다.
한국 생명공학기술 연구개발의 구축자로 선도적 역할을 해오셨는데 과학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어렸을 때 서울에서 성장했지만 시골에 내려가 자연을 접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방학 때마다 할아버지 댁에 가서 곤충이나 식물을 관찰하곤 했죠. 중학교 시절에 ‘생물반’에 들어가 활동하며 생물학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생물학과로 진학했습니다. 1956년 대학을 졸업할 때 논문을 쓰게 된 것이 효소 연구의 시작이 되었고, 이후 박사과정을 하며 효소의 연구에 흥미를 갖게 되었죠. 저는 효소, 단백질에 관한 기초연구를 토대로, 74년 귀국 후에 바이오산업 발전을 위한 응용연구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KIST 유치과학자로 초청되어 연구개발을 통한 산업발전을 이끄셨습니다.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1974년 KIST 유치과학자로 귀국하여 응용생화학연구실을 개설하고 효소를 비롯한 생명과학적 원리를 산업적으로 응용하는 연구에 집중했어요. 모든 연구 개발의 우선순위는 산업화 또는 수입 대체를 위한 국산화 연구개발이 우선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여건상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죠. 바이오 특성에 맞는 기초연구 시설도 부족했고 연구개발비 확보도 어려웠어요. 그래서 가장 이슈가 될 만한 과제를 선택해서 연구개발비를 확보했는데 대체 감미료인 이성화당(인조꿀)을 생산하는 효소공정을 개발해 산업화를 이루었고, 이어서 1970년대 의약원료로 수입량이 가장 많았던 항결핵제(리파암피신)의 국산화를 위해 리파마이신을 개발했습니다. 여기서 개발한 리파암피신 원료 생산기술을 기반으로 국내 바이오벤처기업 제1호인 유한화학을 창업해서 기업화에도 성공했습니다. 유전공학 기술개발 사업도 벌이며 신생기술 개발 역량의 조기 확보를 위해서 노력했는데,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방법이었습니다.
1981년에 박사님께서 작성한 ‘생명과학 및 생물공업기술의 육성을 위한 연구개발계획수립에 관한 연구’ 보고서가 우리나라 현대 생명공학 및 생명산업 정책의 기초가 되었죠.
과기처 지원 기획 사업을 통해서 생명공학부 내 전문가와 학계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작성한 보고서로 장기적으로 생명과학기술 육성을 염두에 두고 기초생명과학 육성과 광범위한 생명공학 관련기술 및 인프라 구축 사업을 포함한 보고서입니다. 당시 여러 한계성으로 우선적으로 유전공학 기술 개발을 집중 육성, 지원하도록 했고 단계적으로 다른 생명공학 분야로 확대하고 생명과학 육성을 위한 장기 전략을 강구하도록 했습니다. 이후 ‘Biotech 2000'계획을 수립해 유전체 기술을 포함한 10대 기술 분야를 도출하고 지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죠.
유전공학센터의 초대 소장으로, 센터를 운영하시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점은 무엇일까요?
우리나라 유전공학 기술의 육성은 백지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전자 재조합 실험에 필요한 기본 장치들도 없는 상태였어요. 유전공학센터를 발족할 때도 어려움이 많았지만 당시 국내 생명과학 관련 연구소가 없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생명공학 연구소를 세울 수 있는 최소한의 기초를 구축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노력했습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장기적으로 지속 발전을 위한 치밀한 단계적 이행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었습니다.
88서울올림픽 때 도핑컨트롤센터 소장을 맡으셔서, 약물검사 지원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셨습니다. 당시 큰 책임감을 느끼셨을 것 같아요.
도핑컨트롤센터 사업은 ’88 서울올림픽’을 차질 없이 지원해야 된다는 절박한 문제였습니다. 국제적으로 우리나라 과학기술 역량의 자존심이 걸려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대한민국 과학기술계의 명예를 짊어진다는 각오로 임했습니다. ‘성공 못하면 끝난다’, 그러나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사업을 수행했어요. 당시 국내 여건으로는 금기 약물을 분석해본 전문가도 없었고 변변한 기기분석 장비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어요. 이런 상황에서 독자적 이행 계획과 단계적 추진전략을 수립했죠. 금기약물 분석기술을 개발하고 분석 장비 구축과 기술 인력을 훈련시켜 전문 요원을 확보했어요. 결과적으로 이 모든 계획이 순조롭게 이루어져 성공적으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바이오벤처인 프로테오젠을 창업하고, 2011년에는 한국바이오협회 발족에 선도적 역할을 하며 국내 바이오제약산업 발전을 이끌어오셨는데요. 기억에 남는 일이 많으셨죠
시대적 필요에 따라 80년대 유전공학연구조합, 90년대 한국생물산업협회, 2000년에 한국바이오벤처협회 등이 창립되었습니다. 바이오와 제약기업의 연구개발 역량 제고와 바이오산업 육성을 위한 공통의 목표를 갖고 있었지만 주무부처가 다르고 이해관계가 얽혀있어서 통합이 쉽지 않았는데 2008년에 마음을 열고 통합에 동의해서 오늘의 한국바이오협회로 성장한 것은 가장 기억에 남을 만큼 의미 있는 일이었죠. 2000년 프로테오젠을 창업해 단백질 칩을 이용한 신약개발 연구를 한 것도 기억에 남는 일입니다. 신기술 개발과정에서 문제를 해결하며 기술적 돌파구를 만들었을 때 과학자만이 느낄 수 있는 희열이 있고, 성취감은 정말 큽니다.
생명공학 분야에서 많은 학술논문, 기술동향 총설논문 또는 정책기고문을 발표하시며 기술 확산에 크게 기여하셨는데요. 과학자들에게 논문 발표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저보다 더 많이 쓰신 분들도 계시지만, 당시 산업화 기술개발을 하면서 창의적 논문을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유전공학센터에 있을 때도 논문을 잘 쓰도록 3P 전략을 썼죠. Product, Patent, Paper 순으로 우선순위를 두고 장려했어요. 과학자들에게 논문 발표는 무엇보다도 자기가 연구개발한 결과를 정리하고 마무리해서 기록으로 남긴다는 의미가 있겠죠. 또 자기 연구결과를 널리 알리려는 소통의 수단이기도 하고, 새로운 연구결과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연구실적 평가를 위한 숫자적 지표가 되기도 하겠지만 결국 양보다는 질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생명공학자로서의 삶에 매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처음에 기초연구 분야에 대한 연구는 자연현상에 대한 호기심이 동력이었고, 이후 응용연구 분야에서는 사회적 니즈에 대해 과학기술 발전과 연구개발에 동참하겠다는 마음이 컸죠. 한 분야에 대한 학습과 지식이 축적되면 될수록 연구개발에 대한 흥미가 더 커지면서 지속적으로 몰입하게 되는 것 같아요. 연구개발 역량 극대화를 위해서 과학기술자들이 자율적으로 소신껏 연구 개발할 수 있는 여건 조성과 적극적 지원이 더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우리나라 과학계의 현주소,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조언해주세요.
지난 세기에는 과학기술 발전을 경제발전의 수단으로 이용해왔습니다. 그리하여 ‘기술’은 있어도 ‘과학’은 없었으며 ‘개발’은 있어도 참다운 ‘연구’는 없었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전주기적 기술개발시스템’이 구축되는 과정에 있어요. 기초과학연구는 가설기반연구를 확산시켜 자연계의 큰 원리를 찾아내는 노력이 필요해요. 그리고 창출된 기초연구를 바탕으로 실용화가 가능하도록 과학기반기술 개발을 위한 시스템의 적극적 지원전략이 필요하겠죠.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한 분야별 연구개발 역량 제고도 시급합니다
‘지금의 나를 만든 세 가지’를 말씀해주세요. 또 어떤 인물로 기억되기를 바라시나요?
첫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에 대해 도전하고 배우고자 했던 집념, 둘째는 배운 지식을 나라 발전을 위해 기여하라는 사명감을 갖게 해 주신 선친의 가르침과 KIST에서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해주신 나라의 부름 덕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창의적 노력으로 만들어진 무형의 결과물만이 내 것이라는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저를 우리나라 생명공학 발전에 한 씨앗이 된, ‘Biotopia(생명사회)’를 꿈꾸는 생명공학자라고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되신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과학기술자로서 가장 명예스러운 유공자로 선정되어 영광스럽습니다. 그동안 여러모로 성원해주시고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생명과학분야에서 미력하나마 제가 이루어 놓은 조그마한 자취를 높이 평가해주신 것을 감사드리며 이 분야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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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희 박사는 1970~80년대의 어려운 여건에서도 기초연구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효소공학, 응용미생물학 및 생명공학 분야에서 130여 편에 달하는 학술논문을 발표했다. 생명과학 연구개발 육성을 위한 정책도출과 기술 확산에도 크게 기여하며 국민훈장 동백장을 비롯해 대통령 표창, 대한민국 과학기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 유전공학의 육성에 앞장서고 생명공학기술 연구개발의 기반을 마련하며 바이오와 공학, 의학의 접목을 통한 융합기술 개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논어에 나오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은 평생 가슴에 깊이 새기며 실천해온 연구철학이기도 하다.
“옛것을 연구해서 미루어 새것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지략이 있어야 해요. 미래에 다가올 새로운 것에 대한 예측력과 도전정신이 필요합니다.” 생명공학자에게는 특히 건전한 윤리관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한문희 박사. 그는 평생 생명사회 구현을 꿈꾸며, 한 알의 씨앗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제 그가 뿌린 씨앗들은 무럭무럭 자라 새로운 세상, 바이오토피아를 만드는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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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희 유공자 인터뷰 -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