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최장수 여성장관으로
21세기 한국 환경정책의 기틀을 세우다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
융복합적 시각으로 과학기술과 환경, 여성, 안보 등 정책 비전 제시와 집행
여성 과학기술인력의 사회 참여 확대와 지위 향상 선도
40여년간 저서 발간과 강연, 언론매체, NGO 등을 통해 과학대중화, 사회적 이슈 해법 제시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 발사가 인문학 성향의 대한민국의 한 소녀를 과학자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스푸트니크 발사에 충격 받은 미국에서 과학기술 교육혁명의 바람이 불던 때, 교환교수이던 아버지가 딸에게 이공계 진학을 권고한 것이 김명자 박사가 서울대 화학과로 진학하게 된 계기였다. 이후 1994년 개설된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 참여하면서 과학의 사회적, 문명사적 상호작용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고, 역서와 저서 발간을 비롯해 정책 자문 활동과 행정부, 입법부, NGO에서 융합 혁신을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된 계기가 되었다. 특히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시절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의 10명 위원 중 홍일점으로 연임되는 과정을 거쳐 1999년 환경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국정 운영에서 논리와 소통, 공감, 합의 도출로 독보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며 ‘국민의 정부 최장수 장관’, ‘헌정 최장수 여성장관’에 더해 최우수 부처 연속 선정 등의 기록을 남긴 후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과학 전문성을 바탕으로 여성 최초로 국방위원회 간사와 국회윤리특별위원장을 지냈다.
2016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 50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 회장으로 선출되어 또다시 유리천장을 깼다고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그리고 과총 회장으로서 학계, 행정부, 입법부에서 쌓은 융복합적 관점에서 과학기술 관련 사회적 현안을 해결하고 지속가능발전이라는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2차 산업혁명의 전성기인 20세기 초반 미국은 과학기술인력이 산업계, 기업, 국가 정책 분야로 진출해 ‘사회적 엔지니어링’을 실현했고, 그 결실이 현대산업사회의 탄생이었다. 오늘날 기후위기와 팬데믹, 4차 산업혁명의 문명의 대전환기에서 과학기술계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과학기술 이외의 모든 영역에서 과학기술의 융합적 접목으로 시대 변화에 부응하는 융합형 모델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오늘날처럼 사회가 다원화되고 복합화될수록 융복합의 가치는 더 크다. 그 가치를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실천에 옮긴 김 박사는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통찰력의 선구자로서 시대를 앞서 새로운 미래의 창조에 앞장선 거인이다.
청소년기에 과학자의 길을 걷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요?
어린 시절 특별히 과학 과목에 뛰어난 건 아니었고, 오히려 문과 과목 성적이 더 좋았습니다. 그런데 대학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시점에서 미국 예일 대학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이공계가 유망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소련이 쏘아 올린 스푸트니크가 한국에 있는 저의 진로에 영향을 미친 셈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2021년에 제 손녀가 과학예술영재학교에 진학했는데, 엄마들이 “애들이 과학의 길을 택해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게 될 것을 걱정한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1971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해서 숙명여대 교수로 재직하셨습니다. 교수이자 여성 과학자로서의 삶을 회고한다면?
미국 버지니아 대학(University of Virginia)에서 4년 만에 박사학위를 마쳤습니다. 당시 과학교육혁명으로 석박사 통합 패스트 트랙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박사과정 중에 첫 아이를 출산했고 반년 만에 서울로 보냈기 때문에 졸업식 끝나자 곧바로 귀국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모든 게 악조건이었습니다. 세 아이의 엄마이자 유교 전통의 며느리로서 일-가정 양립은 ‘수퍼우먼’으로 살지 않으면 안될 일이었습니다. 체중이 현재보다 15킬로그램 적은 말라깽이였던 때도 있었습니다. 요즘 신세대는 수퍼우먼으로 사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러니 출산파업(?) 현상이 빚어지는 거지요. 70년대 강의전담 교수로 지내다시피 하면서 심적 갈등이 커졌고, 자아를 살릴 수 있는 돌파구를 찾은 것이 밤에 집에서도 할 수 있는 번역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옛날 번역하던 원서를 보니 애들이 자기랑 놀자면서 책에 끄적거린 흔적을 보고 마음에 가슴이 찡해지더군요.
일찍부터 과학사(科學史) 분야에 관심을 갖고 오랫동안 과학사 강의도 하셨습니다. 화학 교수로서다른 전공에 눈뜨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또 융합의 의미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제가 학문 간의 융합적 접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4년 서울대 대학원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덕분이었습니다. 주임교수였던 서울대 김영식 교수님은 저보다 학번은 3년 아래지만 영원한 스승입니다. 과학기술의 사회적, 문명사적 상호작용에 대한 저술과 강연, 각종 정책 업무에 본격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융합적 접근은 과학기술 분야 내부의 세부 분야 사이에서도 혁신의 돌파구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든 부문이 다 얽혀 있고 상호의존적인 융합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따라서 국제적으로 국가적으로 당면하고 있는 리스크는 모두 얽혀 있고 상호 연관됩니다. 때문에 그 솔루션도 통합적이고 융합적인 접근에 의해 찾을 수 있습니다.
환경부 장관, 국회의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등 명실상부한 융복합 활동을 하며 모든 직책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으시는 것 같습니다. 전천후 커리어를 사셨는데요.
돌아보면 한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일생 동안 작은 일 큰 일 구분하지 않고 그때그때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 했습니다. 환경부 장관직은 무거운 자리였지만 교수 시절처럼 일했고, 교수가 장관으로 성공한 사례가 별로 없다는 기존 관념을 깼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국회에서도 국방위원 이외에 아시아정당국제회의 공동조직위원장, 한일의원연맹 고문, 한미의원협회 의원, 한미일 의원 삼각회의 한국 대표 등 외국 정상과 글로벌 리더들을 접견하는 소중한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2003년 명지대 석좌교수, 2008년부터 2016년까지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초빙특훈교수 등을 지내며 아직도 석학 특강을 하고 있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환경부 장관 재임 시절, 환경부가 정부 부처 업무평가에서 제1회-2회 연속 최우수 부처로 선정되었습니다. 과학 전문성이 정책 기획과 업무 추진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장관으로 부임한 뒤 법적 근거에 의한 정부 부처 업무평가가 시작되었는데, 기대하지 못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게 환경행정인데, 환경부가 제1회, 2회 연속 최우수 부처로 선정돼 대통령 표창을 받은 것이지요. 최장수 장관에 최우수 부처가 되고 김대중 대통령 정부 마감과 함께 퇴임하게 되니 빛나는 졸업장에 우등상까지 받게 해주어 고맙다고 퇴임사를 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1980년대부터 과학기술 정책 관련 활동을 많이 하면서 수많은 정책 보고서를 작성하고, 특히 김영삼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 시절 대통령 자문보고서를 작성한 것도 저력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자 출신 장관으로 정책 수립과 추진에서 과학적 기초에 기반한 설득 논리를 바탕으로 소통과 공감, 합의 도출이라는 거버넌스를 실현했고 비단 과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과학적 방법론이 매우 중요한 자산이었습니다.
2016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반백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 회장으로 선출되셨습니다. 최초의 여성 수장으로서의 소회를 부탁 드립니다.
취임 후 조직을 개편하고, 3대 기초분야 학술비전 로드맵, 4차 산업혁명 관련 규제 등에 대한 300여회의 전문가회의와 포럼, 사이언스 플라자 착공 등의 굵직한 사업을 성사시켰습니다. 과총 로고도 기부해주신 분이 계셔서 멋지게 바꿨습니다. 과학기술의 사회적 책임과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하고, 미세먼지 국민포럼, 플라스틱 이슈포럼 등 국민 눈높이에 맞는 포럼 시리즈를 연중 기획으로 추진하고 정책 대안을 제시한 것이 보람입니다. 2017년 취임사에서 “꿈도 과총 꿈만 꾸겠다고 했는데, 비상근직을 상근직처럼 일했습니다. 직원들이 업무가 많아져서 고생을 많이 했지요. 퇴임할 때 제게 동영상을 만들어주었는데 “이렇게 일을 많이 했나” 싶어서 감격스럽고 고마웠습니다.
여성 과학기술인의 사회 진출과 지위 향상을 위해서도 오랫동안 기여해 오셨습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에서 여성 과학자의 역할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요?
1997년 제가 연구책임자로 작성한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획기적 발전방안”에서 제시한 정책 제안이 여성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로 제정되어 기뻤습니다. 2012년부터는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으로 “소통과 융합, 과학외교”를 슬로건으로 국내외 기관과 협력하는 프로그램을 시행했고, 한국여기자협회로부터 감사패도 받았습니다. 여성과학자로 살면서, 여성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여성들이 정책 결정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가야 하고,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으로 인식되는 분야에 진출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일했습니다. 과학기술 여성인력을 사장시키는 한 국가 경쟁력 강화는 어렵다고 봅니다.
좌우명은 무엇인가요? 지치는 때도 있으셨을 텐데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내가 해야 할 바를 다 하고, 그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저를 자유롭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살이의 키워드를 열정, 성실, 헌신, 긍정 마인드로 삼고, 무엇보다도 욕심을 버리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일 욕심만큼은 아직 버리질 못했네요. 뜻하지 않게 공직자의 삶을 살게 되면서는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철저히 지키고자 했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저는 워라벨이라는 용어와는 거리가 멀어서, work와 life를 구분하고 균형을 맞추기보다는 그 두 가지를 엮는 삶을 살았습니다. 일에서 느끼는 스트레스는 생활에서 풀고, 생활 속의 스트레스는 일에서 풀었다고나 할까요. 스트레스가 있어도 성취감이 컸기 때문에 상쇄되곤 했습니다.
1970년대 말부터 20여권의 책을 저술하셨고 2020년에는 <산업혁명으로 세계사를 읽다>와 <팬데믹과 문명>이 동시에 우수과학도서로 선정되었는데, 과학 저술 활동의 의미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제가 계속 책을 쓰는 이유는 과학자로서의 사회적 책임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20년에 출간한 <팬데믹과 문명>도 팬데믹 충격으로 전 세계가 패닉에 빠지는 현실을 목도하며 미시적 접근에서 벗어나 문명사 속의 팬데믹에 대해 정리해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월부터 밤낮없이 써서 넉 달 만에 402쪽을 썼습니다. 그 직전에 쓴 <산업혁명으로 세계사를 읽다>는 591쪽으로 더 깁니다. 4차 산업혁명의 대전환기에서 18세기 후반 1차 산업혁명으로부터 4차에 이르기까지 산업기술과 사회경제정치문화 등 모든 분야를 입체적으로 조명했습니다. 동일 저자의 책 그 두 권이 한꺼번에 우수과학도서로 선정되고 보니 감개 무량합니다. 두껍고 쉽지 않은 과학 책이 인기가 있을 리 만무한데, 그동안 공저까지 합쳐서 20여권을 썼네요. 서점에 가보면 과학도서는 역서가 대부분인 현실도 타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GDP 대비 연구개발비가 최고 수준인 국가가 이래서 되나 싶습니다.
끝으로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되신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선배 원로 석학도 많이 계시는데, 제가 선정되어 기뻐하기가 송구스럽고 과분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오늘날의 과학기술 환경에서 융합 분야에서 선정되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21세기 고도의 과학기술사회는 과학기술 이외의 모든 영역이 과학적 사고와 지식과 방법론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고, 특히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과학기술 내적인 융합혁신에서 나아가 다른 분야와의 융합혁신이 국제 경쟁력을 가늠하는 핵심 요소로 부상했습니다. 이런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노벨상 수준의 연구 성과를 내는 과학자들의 활동을 성원하는 한편으로 기업, 행정, 입법, 문화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과학기술 전공의 청년세대가 약진하는 시대가 오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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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자 박사는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명지대 석좌교수, 카이스트 초빙특훈교수 등 학계와 환경부 장관(헌정 최장수 여성장관), 국회의원(국방위원회 간사) 등 행정부와 입법부에서 과학자로서 두각을 나타낸 드문 경력의 소유자다. 2016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50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 회장으로 선출되어 조직 개편과 정책 제시 등으로 과총의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2년 이후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과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이사장으로 여성 인력의 사회 진출 활성화에 기여했다.
과학기술, 환경, 교육, 국방, 외교, NGO 등의 분야에서 과학기술 전문성으로 ‘합리성과 감성의 리더십’을 실천한 그는 대한민국 과학기술상 진흥상(대통령상), 제1회 ‘닮고 싶고 되고 싶은 과학기술인상’, 청조근정훈장, 과학기술훈장 창조상,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등을 받았다. 현재도 (사)서울국제포럼 회장 등 30여개 직책으로 자문과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서울국제포럼은 다양한 분야의 원로와 석학들이 국제정치, 외교안보, 경제통상을 비롯해 에너지, 식량, 사이버, 보건안보 등의 신안보 아젠다를 다루는 융합 플랫폼이다. 회장으로서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신국제질서 구축과 4차 산업혁명의 격동기에서 국제사회 속의 한국의 위상을 정립하는 융합적 논의의 장을 활성화하고 있어, 또 하나의 융합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아직도 현역으로 일하는 그를 언론은 과학기술계의 대표적 지성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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