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석유공사 기술이사로서 울산정유공장 건설을 주도
전엔지니어링, 신한기공건설을 세워 공장설계 및 건설기술 수출
화학공학 관련 학회 창립으로 화학공학 제도화에 이바지
故 전민제(全民濟)
전엔지니어링 사장
(1922~2020)
- 학력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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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945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조수(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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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950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이수(화학)
- 경력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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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950
조선종합공업주식회사(해방 전 종합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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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1983
신한기공건설(주), 이수화학공업(주) 대표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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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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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제 회장은 울산정유공장 건설과 석유화학공장 플랜트 설계를 주도하여 한국 석유산업의 발전을 이끈 선구적인 엔지니어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종합과학연구소를 설립하여 빙초산 제조공장 설계를 시작으로 엔지니어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화학과의 조수로 들어가 화학에 대한 기초적 학습을 하고, 회사를 설립하여 일본 기업의 의뢰를 받아 빙초산의 대량생산이 가능한 공장 설계를 하였다. 이 경험을 살려 해방 후에는 조선종합공업주식회사를 세워 빙초산 공장을 설계, 건설, 운영까지 하며 수입에만 의존했던 빙초산의 완전 국산화를 가능케 했다. 회사를 경영하면서 그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아세트알데히드 기상산화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여 학문적 기반도 닦았다.
그는 한국 석유산업의 구심점이 된 울산정유공장 건설을 주도한 엔지니어이자 경영인이었다. 한국전쟁 후 이승만 정부는 울산정유공장 복구를 제1정책 사안으로 두고 그를 조선석유회사의 관리인으로 위촉했다. 그는 울산정유공장의 증류량을 늘리고, 최신설비를 들여와 선진화된 형태로 재건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Project of Ulsan Oil Refinery(울산정유공장계획)”을 작성하여 상공부에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뒤이어 등장한 박정희 정부에 알려지며, 그가 정유공장 건설을 담당할 대한석유공사의 기술이사로 발탁되는 계기가 됐다. 당시 함께 선임된 임원진들은 모두 군인과 행정관료 출신들이어서 사실상 기술 관련 업무는 그가 도맡아서 했다. 그는 특별히 실제 업무를 이끌 기술진 육성에 공들여 신입사원들을 해외에 파견하여 기술연수를 받게 하고 돌아오면 곧바로 현장에 투입하여 초기 대한석유공사의 기술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렇게 해서 1963년 12월 14일 한국 최초의 정유공장이 탄생했다.
설계 전문회사인 ‘전(全)엔지니어링’과 ‘신한기공건설’을 설립한 그는 한국 석유화학의 기술적 토대를 마련하는 일에도 주도적으로 나섰다. 대한석유공사에 근무하기 전부터 조선종합공업주식회사, 한미화학공업, 해림화학공업과 같은 화학물질 제조업체와 함께 공장 설계 회사인 전화공(全化工)설계사무소를 설립하여 독자적으로 운영했다. 이때의 경험은 대한석유공사 퇴사 후 그가 전엔지니어링을 설립하면서 다시 이어졌다. 전엔지니어링은 석유화학 공장의 플랜트 설계를 중심으로 각종 공장 설계를 국가로부터 위탁받아 짧은 시간 내 한국을 대표하는 설계회사가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신한기공건설을 설립하여 설계부터 건설까지 일원화하고, 해외로 사업을 확장하여 매우 이른 시기에 글로벌 회사로 성장시켰다.
그는 회사를 경영하면서도 엔지니어 양성과 화학공학의 제도화에 힘썼다. 전엔지니어링 설립 당시부터 그는 기술훈련소를 마련하여 현장형 엔지니어를 육성하는 시스템을 구축했고, 여기서 교육받은 많은 이들이 한국의 석유산업을 이끌어가는 주요 엔지니어가 됐다. 한편 그는 대한화학회와 한국화학공학회의 창립을 주도하고 한국화학회관 건설에 앞장서며 한국 화학계의 제도적 발판을 마련하는 데 앞장섰다. 이후 화학공학에서 재료연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한국부식학회와 한국재료학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하며 화학공학의 학문적 확장에도 큰 기여를 했다.
전민제 회장은 한국 석유산업의 발전을 이끈 경영자이자, 엔지니어 그리고 화학공학자였다. 그는 현장에서 스스로 기술력을 익혀 엔지니어로 성장했고, 경영자를 넘어 과학기술자로서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이런 그의 모습에 후학들은 석유산업의 개척자이자 ‘영원한 스승’으로 그를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