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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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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과학자의 리더십을 발휘하다 - ㉑ 박노희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㉑ 구강암 및 바이러스 분야 세계적 치의학자 박노희 UCLA 석학교수

美 한인 최초 UCLA 치과대학 학장으로 4번 연임 연구·교육·행정 혁신 통해 학교 발전 이끌어

미국 UCLA 치과대학 건물 1층 한쪽 벽면. 역대 치과대학 학장들의 초상화가 자리 잡고 있는 그곳에 한국인의 얼굴이 걸렸다. 미국 UCLA 치과대학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한국인 최초 치과대 학장 박노희 교수다. 그의 후임인 크렙스바크 UCLA 치과대 학장은 “새로 부임한지 7개월 만에 박 전 학장이 지난 18년간 놀라운 리더십을 보여줬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라고 말하며, 박 교수의 업적을 칭송했다. 그는 미국에 한국인 과학자의 이름을 새기며 한국인의 자긍심을 드높인 세계적인 치의학자이다.

박노희 교수는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손꼽히는 수재였던 그는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입학했는데, 약리학에도 관심이 많아 약리학 연구소에서도 일하며 주경야독했다. 
그는 서울대 치과대학병원 치주과에서 수련과정을 마치고 군 복무 후인 1975년 1월 미국으로 1년의 단기연수를 떠났는데, 연수가 끝나고 귀국 대신 조지아 대학 의대 입학을 택했다.

연수만 받고 돌아오려고 했던 그가 미국에 머문 이유는 ‘앎’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 그는 선진 과학기술의 요람이기도 했던 미국에서 부족한 지식을 쌓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했다. 
조지아 대학 의대 입학 2년 만에 약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도 그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필요한 논문은 단 1편이었으나 그는 2년간 박사 학위 과정을 공부하면서 무려 15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전무후무한 기록은 당시 학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의 배움엔 끝이 없었다. 박 교수는 조지아 대학에서 약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곧바로 하버드 의대 안과 포스트닥 펠로우 겸 강사로 갔다. 이후 치과대학으로 가기 위해 다시 대학 공부를 시작한 그는
1982년 하버드대 치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졸업한다.

당시 약리학과 치의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가 가장 관심을 보였던 분야는 바로 바이러스 연구였다. 
특히 하버드대 조교수 시절에 진행했던 항바이러스 약품 아사이클로비르(acyclovir) 작용 기전 연구는 주변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연구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만 골라 죽이는
항바이러스 약품에 대한 연구로 당시 획기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주목을 받았다. 하버드대 조교수에서 UCLA 종신 재직 교수로 자리를 옮긴 것도 이러한 학문적 성과 때문이었다.

학계가 ‘의학 연구자 박노희’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그가 UCLA에 자리 잡자 미국국립보건원(NIH)을 비롯한 여러 기관과 단체에서 박 교수에게 연구 기금을 제공했다. 연구비가 없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던 UCLA 치과대학은 박 교수가 온 후 2년 만에 300만 달러의 기금을 확보할 수 있었고, 치과 연구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게 된다. UCLA 치과대학이 발표한 내용에 의하면 박 교수가 재직 중 받은 연구비는 2000만 달러를 훌쩍 넘는다.

학자로서 자리를 잡게 된 그는 끊임없이 연구에 대한 아이디어를 냈고, 이러한 집념은 실질적인 성과로 나타났다.
박 교수는 173개의 SCI급 실험논문과 11개의 리뷰논문, 10개의 챕터를 편찬했으며 206개의 초록을 국제학회에 발표하며, 학계를 놀라게 했다. 특히 그의 구강암 발암기전에 관한 연구는 
세계 치의학 연구 분야에서 독보적인 연구성과로 인정받고 있다. 박 교수는 인유두종 바이러스(HPV)의 역할을 규명하고 이를 통해 구강암 특이성을 가지는 암세포주를 확립했으며, 유전자의 불안정성이 미치는 발암기전을 연구해 사람 유래 각질세포를 이용한 세포 노화 모델을 확립하는 등의 성과를 거뒀다.

박 교수는 연구뿐만 아니라 학생들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약리학을 가르치던 기간 동안 UCLA 치대생들이 전문의시험에서 해당 과목은 전원 통과했다는 것이 하나의 예. 그는 교수시절 학생들의 강의평가에서 항상 높은 점수를 받았고, 학장으로 재임할 때는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도 10배로 늘려 매해 300만 달러 이상의 장학금을 학생들에게 지원했다.

과학자로서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던 박 교수가 UCLA 치과대학을 책임지는 학장직에 도전한 배경에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어려운 일들을 후배 한국인 유학생들이 겪지 않도록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박 교수는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리더십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결국 치열한 노력 끝에 그는 UCLA에 들어온 지 13년 만인 1998년, UCLA 치과대학을 책임지는 학장에 선임된다. 1964년 UCLA 치과대학이 창립된 이래 아시아계, 그것도 한인 학장이 나온 건 그가 최초였다.

과학자로서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던 박 교수가 UCLA 치과대학을 책임지는 학장직에 도전한 배경에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어려운 일들을 후배 한국인 유학생들이 겪지 않도록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박 교수는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리더십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결국 치열한 노력 끝에 그는 UCLA에 들어온 지 13년 만인 1998년, UCLA 치과대학을 책임지는 학장에 선임된다. 1964년 UCLA 치과대학이 창립된 이래 아시아계, 그것도 한인 학장이 나온 건 그가 최초였다.

특히 그는 과학이 융합해야 발전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다는 확신 아래 교육 시스템을 바꾸는 데에도 앞장섰다. 박 교수는 공대 교수를 치과대학에 초빙해 치과 관련 나노 과학 분야를 개척했다. 이런 방식은 UCLA 의대와 공대가 힘을 합쳐 휴대전화로 결핵 유무를 판별하는 기술과 타액만으로 췌장암, 폐암 환자를 진찰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기반이 됐다. 박 교수는 최근 50년 내 UCLA 치대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학장을 역임한 학자였으며, UCLA 치대에 이전보다 5배나 많은 연간 정부 및 비정부 연구비를 수주해 온 학장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최근에는 UCLA 치과대학 교수진으로 구성된 구강생물학 및 바이러스학 연구팀을 지휘해 구강암의 발생기전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 실제적으로 임상치료 및 시술 과정에서 드러나는 환자들의 고통과 증상을 기초 연구에 대입하는 등 조직공학적인 연구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혁신적인 연구성과는 네이처, 셀 등 유수의 학술지에 게재되며 높은 인용횟수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박 교수는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국내 대학의 많은 연구자들을 UCLA에 초청하여 해외연수 기회를 제공하고, 
초청 강연 및 특강 등을 통하여 국내 연구자들에게 식견을 전수하는 등 국내 치과대학 연구자들의 연구력 향상과 연구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학문의 발전은 지식의 확산과 공유로부터 새롭게 파생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치의과학 분야의 연구성과와 학계에서 발휘한 리더십을 인정받아 국제치과연구학회의 뛰어난 과학자상, 하버드 치과대학 졸업 25주년 특별상, 제 17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미국치의학교육협회 기스상(치의학 교육 부문) Medical College of Georgia 대학원 자랑스러운 동문상 등을 수상했다. 
박 교수는 세계적인 연구자이자, 과학분야 교육자 및 경영인으로서, 세계 속에 자리 잡은 한국인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위상을 세우는 데 기여했다.

2009년 샤피로 가족 자선재단은 박 교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박노희 박사 치과학 석좌교수직’ 신설을 위해 UCLA 치대에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대한민국 정부 역시 그를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하고, 업적을 기리고 있다. 수많은 칭송에도 그는 여전히 현역의 과학자로 현장을 누빈다. 한인 미국 유학생들의 등불이었던 그가 제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한 가지다. 
꿈과 희망을 품고 최선을 다하라는 것. “최선을 다하고 항상 준비된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대비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면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 꿈과 희망을 품고 최선을 다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