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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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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연구개발의 터를 다지다- ② 故 최형섭 과학기술유공자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② 과학기술 행정의 기틀 세운 정책 대부(代父) 故 최형섭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초대 소장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2 - 과학기술 행정의 기틀 세운 정책 대부(代父) 故최형섭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초대 소장 우리나라 연구개발의 터를 다지다 KIST, 대덕연구단지, 한국과학재단 탄생의 산파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를 지켰던 과학자 이야기 학력-1944 일본 와세다대학교 이공학부 채광야금과, 1955 미국 노틀담대학원 공학석사, 1958 미국 미네소타대학원 공학박사(금속공학), 경력-1962~1966 원자력연구소 소장, 1966~1971 KIST 초대 소장, 1971~1978 과학기술처 장관, 포상-1944 5.16민족상, 1996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7 닛케이 아시아 국제대상(일본경제신문사)

지난 달, 우정사업본부는 지리학자 김정호, 과학기술자 이천, 과학기술정책가 최형섭을 담은 한국의 ㅎ과학인 기념우표 3종을 발행했다. 故최형섭 KIST 초대 소장은 일단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과학자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과학기술처 발족일인 1967년 4월 21일을 기념해 지정한 과학의 날을 맞아 역대 최장수인 7년 반 동안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한 최형섭 박사의 일생이 어떻게 우리나라를 바꾸어놓았는지 반추해본다.

1966.10.06 한국과학기술연구소 기공식 사진(출처 KIST) 1965년 5월 17일 한미 정상회담 이후 발표된 공동성명문 마지막 부분에는 한국과 미국이 공동으로 지원해 종합연구기관을 설립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성명 발표 전 마지막 순간에 들어간 해당 문안을 계기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연구소이자 이후 수많은 정부출연연구기관의 모태가 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탄생하게 된다.

KIST 초대 이사 기념사진(출처 KIST) KIST를 이끌어 갈 초대 소장으로는 최형섭 박사가 낙점됐다. 당시 최형섭 박사는 낮에는 원자력연구소에서, 밤에는 민간연구기관인 금속연료종합연구소에서 연구와 행정을 병행할 때였다. 금속연료종합연구소는 대한중석, 한국광업제련공사 등 여러 회사가 공동 출연해 만든 연구소로서 관련 분야 대학교수와 대학원생들이 각 회사가 필요로 하는 연구개발을 전담하고 있었다.

최형섭 박사를 구심점으로 젊은 연구자들의 일사분란한 집중연구는 많은 연구업적을 남겼고, 연구원들이 낮에는 강의하고 수업 받고, 밤에 연구를 한 덕분에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라는 별칭도 있었다. 산.학.연 협동연구이자 수탁연구제도를 도입한 금속연료종합연구소의 운영.관리형태는 KIST 설립에 대비한 사전검토을 위해 내한했던 미국대통령 과학자문 일행의 찬사를 받았고, 추후 KIST에 대폭 반영됐다.

최형섭 박사의 과학행정가적 기질이 본격적으로 발휘된 것은 1966년 KIST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면서부터다. KIST는 미국의 원조로 세워진 연구소였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적해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연구소에 전무한 인재 였다. 두뇌유출이 심각했던 당시엔 학자들이 선진국으로 유학을 떠난 후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국 역시 두뇌유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때였다.

이에 최 박사는 해외에 있는 한국인 과학자, 기술자를 유치해오기로 결심한다. 한국보다 좋은 환경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과학자들의 마음으로 돌리기란 쉽지 않았지만, 최 박사는 직접 젏은 과학자를 만나 하고 싶은 연구보다 정부와 산업에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해야만 한다 고 설득했다. 기초연구보다 나라를 일으킬 수 있는 응용 기술의 개발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대신 자율성을 보장하고 최고 대우를 해주겠다는 최 박사의 말에 젊은 과학자들의 마음도 움직였고, 선진국의 대학과 연구소에서 일하던 촉망받던 과학자 18명이 귀국을 결심했다. 그들은 이후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을 이끈 주역으로 활약했다.

연구자들은 연구에만 몰두하라, 최 박사는 연구자들이 정부의 간섭이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반 행정 기주으로 연구 업무를 재려 하면 반드시 문제가 발생한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1977.3.16 산업의 국제화와 기술혁신에 관한 심포지움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또한 계약연구 제도를 도입해 기업의 적극적인 참여와 연구자의 책임 있는 업무수행이라는 공업연구 추진의 기본자세를 확립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KIST는 발족 10여 년 만에 수 천 건의 계약연구를 수행, 국가 공업화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었다. KIST의 이런 운영이념은 타개발도상국 기술개발의 모범사례가 됐고, 그의 운영이념은 국제적으로 Choi-Model 이라고 불리고 있다.

KIST가 국내 산업계의 연구개발 붐을 조성하고 동양 최대의 싱크탱크(Think Tank)로 주목받을 만큼 성장하자, 1971년 최형섭 박사는 51세의 젊은 나이로 2대 과학기술처 장관에 임명된다. 그는 장관에 취임하자마자 과학 기술 관계 법령을 정비하며, 한국 과학의 재도약에 시동을 걸었다. 과학기술 행정의 주요 정책기조로 과학기술 기반 조성 및 강화, 산업기술의 전략적 개발, 과학기술 풍토조성 이라는 3대 기본방향을 설정하고, 촘촘한 정책을 펼쳤다.

그는 각 분야에 걸쳐 전문연구기관 설립에 산파역을 맡아 대학을 포함한 연구소 간의 유기적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또한 KIST를 중심으로 한 서울연구단지, 대덕연구학원도시(대덕연구단지) 건설을 창안하기도 했다. KAIST 설립 계획도 최 박사가 주도했다. 막대한 국가예산이 필요한 일들이었기에 반대는 물론, 수많은 난관이 있었다. 그로나 사심 없이 진심으로 나라를 위했던 최 박사는 끝내 사람들을 설득했고, 결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냈다.

최 박사는 과학기술인들의 처우와 자율성 보장, 자부심에도 각별하게 신경 썼다. KIST 연구원의 월급이 대학교수보다 세 배 많았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장관시절에는 공과대학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국제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기능공게게 김포공항부터 광화문까지 카퍼레이드를 펼쳐주었다.

많은 공직을 맡았지만 최 박사 스스로는 청빈(淸貧)했다. 장관 재직 시 받은 집은 퇴직하면서 국가에 헌납했고, 5.16민족상 과 일본 닛케이아시아상 의 상금 전액은 KIST에 기부했다. KIST 소장으로 재직할 때 쇄도하는 인사 청탁을 단 한건도 들어주지 않았으며, 건설 중인 대덕연구단지를 청와대가 수도 이전 부지로 내놓으라고 해도 끝까지 지켜냈다. 타계한 뒤 남아 있는 재산은 조그마한 아파트 한 채가 전부였다고 한다.

연구자의 덕목 - 학문에 거짓이 없어야 한다, 부귀영화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시간에 초연한 생활연구인이 되어야 한다, 직위에 연연하지 말고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 아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 - 故최형섭 박사 연구자의 덕목 -

거의 묘비에 새겨진 연구자의 덕목은 여전히 후배들에게 맣은 울림을 준다. 청렴한 정신으로 연구기관의 자율성과 안정성을 존중하는 현대적 연구관리 방식을 확립하고, 국내 최초로 시행한 해외우수두뇌의 집단유치 등의 업적은 앞으로도 길이 기억될 것이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사를 이야기함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인 최형섭 박사. 제1호 과학기술행정가로도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그에게 2017년 과학기술유공자 라는 명예가 헌정됐다. 과학의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에서 과학기술의 기틀을 세우고, 연구에 대한 투철한 신념을 후배 과학자들에게 오롯이 남기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후세에도 길이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