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스토리 뉴스

스토리 뉴스

대한민국에 빛과 에너지를 연결하다 - ③ 故한만춘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③ 한국 전력산업 기반 닦은 우리나라 전기공학 박사 1호 故한만춘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3 – 한국 전력산업 기반 닦은 우리나라 전기공학 박사 1호 故 한만춘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에 빛과 에너지를 연결하다 최초의 아날로그 컴퓨터 설계,제작 부족한 전력문제 해결위해 불철주야 노력한 과학자 학력사항-1943 경성제국대학 전기공학과 졸업, 1961 영국 노팅엄대학교(The University of Nottingham) 공학박사, 경력사항-1947∼1950 서울대학교 교수, 1962∼1984 연세대학교 교수, 이공대학장, 1973∼1976 대한전기학회 회장, 포상-1972 동탑산업훈장, 1977 서울특별시 문화상, 1981 국민훈장 동백장

4월 22일은 정보통신의 날 이다. 정보통신 이라고 하면, 스마트폰과 인터넷 등 첨단기술제품이 먼저 떠오르지만, 사실 정보통신 기술의 핵심은 연결 이다. 기념일의 기원이 1884년(고종21) 우정총국 개설에서부터 시작됐고, 집배원의 날 과 체신의 날 까지 내포하고 있음이 이를 뒷받침한다. 우리나라에도 초기 정보통신 연구개발의 씨앗을 심으며, 전기에너지와 인류의 삶을 연결하는데 매진했던 수많은 전기공학자들이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41년을 바쳐 대한민국 전기공학의 기틀을 닦은 故한만춘 박사다.

1948년 5월 14일, 대한민국은 암흑이 됐다. 북한이 남한으로의 송전을 끊은 탓이었다. 남한 전기의 70%를 공급하고 있던 북한의 기습조치로, 대한민국은 심각한 전력난과 마주하게 됐다.

같은 해,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 교수로 부임했던 한만춘 박사는 당시 심각한 전력난 극복을 위한 역할을 맡게 된다. 1943년 경성제국대학 전기공학부를 1회로 졸업하고,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조선전업주식회사(현 한국전력의 전신)에 입사, 5년 간 기획과장 및 발전과장으로 일한 실무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인 전기공학 전공자가 손에 꼽히던 열악한 시기, 그는 전력난 극복을 위해 실무에 투입되는 와중에도 우리나라의 낙후된 전기전자 분야에 인재 양성의 시급함을 직시하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전기전자공학 분야에서 우리말 대학 교재를 처음 출간한 사람도 한만춘 박사다. 당시 학교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교재를 사용해 강의를 할 수 밖에 없었는데, 한 박사는 수많은 저서를 번역하고 출간해 후학들의 학문 증진에 힘썼다. 교류회로, 배전공학, 송전공학, 발전공학, 자동제어이론, 전기통론연습 등이 그가 번역 출판한 저서들이다.

스스로의 학문에 대한 열정도 많았던 한 박사는, 1958년,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 국비유학생 중 하나로서 영국 노팅엄대학(The University of Nottingham)으로 유학, 2년 반 만에 원자로 제어분야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당시 그는 원자력발전제어의 안정성 문제를 분석한 연구로 국내외 원자력 발전과 전력계통의 안정성 확보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60년대 전에는 원자력 계통함수의 값이 모든 마이너스 영역에서는 불안정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한 박사가 박사학위 논문에서 마이너스 영역의 한 값에서만 불안정하다는 이론을 제시하고 증명한 것이다.

귀국 후 그가 처음 한 일은 컴퓨터를 만드는 일이었다. 1964년 태어난 국산 첫 아날로그 컴퓨터 연세101 의 시작은 그다지 거창하지 않았다. 한 박사는 제자들과 만물상을 돌며 버려진 부품을 모았고, 그것을 재료로 진공관 컴퓨터를 제작했다.

연세101은 수식에만 의존했던 전력계통의 해석에 방대하고 복잡한 계산을 가능하게 했고, 전력 계통의 안정도 개선 및 제어기 개발, 원자력 발전의 안정성 연구 등 많은 연구에 쓰이면서 당시 우리나라 전기전자공학 수준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연세101은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557호로 등록됐다.

또한 그는 부족한 전력문제를 해결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1970년대까지도 한국은 발전소가 턱없이 부족해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았다. 정부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 방법을 모색했지만, 당시 사용하고 있던 100V 전압에서는 낭비되는 전력이 너무 많았다.

한 박사는 상당수 나라에서 220V를 사용하고 있는 점에서 착안, 낮은 배전전압(110V) 때문에 생기는 손실을 줄이기 위해 220/380V로 승압하는 정책 근거를 제공해 전력계통을 확충해 나갔다. 그가 내세운 이론적 근거는 1970년대 농촌과 가정에 전력을 원활하게 보급하게 되는 전환점이 됐다.

공학교육과 연구는 실사구시가 핵심이다 – 한 박사는 산학협력의 기틀을 닦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1955년부터 연세대학교 전기공학과로 옮긴 한만춘 교수는 산업대학원과 산업기술연구소 설립을 주도하고, 컴퓨터센터 초대소장을 맡았으며, 1947년부터 대한전기학회 창립회원으로 활동하며 학계와 산업계 연계를 추진했다. 그가 역임한 수많은 직함들은 한 박사가 과학기술 활성화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여준다.

한 교수가 1984년 63세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타계하자 제자들은 젊은 후학 양성에 애썼던 스승의 업적을 기려 춘강 한만춘 교수 기념사업회 를 조직하고 1985년부터 매해 젊은 전기공학도에게 ‘춘강학술상’을 표창하고 있다.

청렴결백한 생활을 하며 자신보다 국가를 먼저 생각했던 한만춘 박사. 과묵하고, 자신에게 엄격했던 그는 제자들에게만은 한없이 자상하고 너그러웠던 참스승이었으며, 동료와 학계의 존경을 받는 공학자였다. 그가 평생을 바쳐 이루고 싶었던 빛나는 대한민국은 현재 현실이 되었으며, 그가 떠난 지 30년 후, 그의 발자취에는 과학기술유공자 라는 명예가 아로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