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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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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울렌벡 이론으로 세계 통계물리학 역사를 새로 쓰다 - ⑩ 故 조순탁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⑩ 국내 1호 이론물리학자로 한국 물리학의 씨앗 뿌린 개척자 故 조순탁 전 한양대 교수

국내 1호 이론물리학자로 한국 물리학의 씨앗 뿌린 개척자 故 조순탁 전 한양대 교수 조-울렌벡 이론으로 세계 통계물리학 역사를 새로 쓰다.국내 최초 1.5 MeV 사이클로트론 입자가속기 건설 주도 이휘소 박사와 함께 미국 물리학 발전 계보에 이름 올리며 권위 인정.

흔히 물리학을 모든 과학의 기초 또는 자연과학의 여왕이라고 말한다. 과학의 법칙이 결국 물리학의 법칙으로 귀착되는데 반해,물리학은 물리학의 법칙으로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물리학의 발전은 새로운 과학의 발달에 토대가 된다.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기초과학이란 말조차 전무했던 시절, 한국의 첫 이론물리학자이자 교육자로서 한국 물리학의 씨앗을 뿌린 학자가 있었다.  
바로 故 조순탁 박사다.

조순탁 박사는 1925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경성 교동공립보통학교, 경기공립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본 교토의 제3고등학교로 진학한 후, 1944년 일본 교토대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광복을 맞이해 귀국한 뒤, 경성대학 물리학과에 2학년으로 편입했지만, 학교는 미 군정이 발표한 ‘국립종합대학 설치계획안(국대안)’*으로 뒤숭숭한 상태였다.  *국립종합대학 설치계획안: 미 군정이 1946년 7월 발표한 안으로 경성대학,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등을 통합하여 국립서울대학교를 설립한다는 내용의 계획안.

국대안 파동으로 조 박사 등 4인의 물리학과 3학년생들은  편입 이후부터 졸업 전까지 경성대학 예과 및 공과 그리고 경성공업전문학교의 학생들에게 일반물리학을 강의해야 했다. 국립서울대학교로 재편된 후에도 교육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지만  그는 1947년 7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를 제1회로 졸업하고 1949년 7월에는 같은 대학원에서 이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당시 상황으로 봤을 때, 그가 받은 석사학위는 독학으로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석사학위를 받고 전임강사로 모교 강단에 섰고, 1955년 봄, 미국 미시건대학(The University of Michigan)으로 유학을 간다. 미국에서 조 박사의 스승은 그 당시 세계 통계 물리학계를 좌지우지할 만큼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조지 울렌벡(George E. Uhlenbeck) 교수였다. 울렌벡 교수는 낯선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제자에게서 남다른 총명함을 발견하고, 밀도가 낮은, 평형상태의 기체를 대상으로 연구되어 온 기체분자운동론을 밀도가 낮지 않은 비평형상태의 기체로 확장하는 문제를 연구 주제로 권한다.

그러나 연구의 실마리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6개월 가까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던 그에게,  울렌벡 교수는 연구 주제를 바꿔보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 스승의 조언대로 플라즈마와 관련된 문제를 연구하던 조 박사. 그러나 갑자기 이전 과제의 해결에 대한 힌트가 떠올랐고, 그는 이후 일사천리로 연구 과제에 대한 논문을 작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작성된 그의 박사 논문 이름은 훗날 그를 세계적 물리학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고밀도 기체의 운동론(The Kinetic Theory of Phenomena in Dense Gas)’이었다.  .

해당 논문에 담겨 있던 ‘조-울렌벡 이론’은  기체의 운동을 기술한 러시아 물리학자 니콜라이 보골류보프의 이론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 밀도가 작지 않은 계에도 적용될 수 있도록 볼츠만 방정식을 일반화시킨 최초의 방정식이다. 통계역학 분야에서도 난제로 꼽혔던 이 문제를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33세의 유학생이 풀어낸 셈이었다. ‘조-울렌벡 이론’은 체계적인 운동학 방정식으로 운동학 이론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이후 이 논문은 통계역학의 많은 단행본을 비롯해 볼츠만 방정식, 특히 고밀도 기체의 볼츠만 방정식을 다루는 논문에서는  빠지지 않고 인용되는 전설적인 고전적 논문이 되었다. 그의 박사 논문은 정식으로 학술지에 게재된 적은 없지만, 대학원 교재에서 하나의 장으로 기재되어 있을 만큼 비평형 통계역학 분야에서는 수없이 인용되고 있다. 1990년대에는 현대 운동론의 요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 이론으로 조 박사는 이휘소 박사와 함께 미국 물리학 발전 계보에 이름 올리며 권위를 인정받았다.

성공가도를 달렸던 미국에서의 생활. 그러나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 고국의 물리학 토대를 다지고,  후학을 양성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마음 깊이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에 자리를 내주겠다는 울렌벡 교수의 제의도 뿌리치고 1958년 한국으로 귀국한다.  귀국 후 서울대학교에서 1964년까지 교수로 재직한 그는, 이후 서강대, KAIST, 한양대를 거치며 후학을 양성했다.

그는 이론물리학자이면서도 실험물리의 중요성을 항상 주장했던 과학자이기도 했다.  귀국 후 물리학의 토착화를 위해 국내 최초의 1.5 MeV 사이클로트론 입자가속기 건조를 주도했던 일이 대표적 행보로 꼽힌다.  
이론과 실험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그의 소신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자력으로 건설한 이 1.5 MeV 사이클로트론 입자가속기는 이후 보조금의 지원 중단으로 폐쇄됐지만,  이 가속기를 통해 양성된 당시의 대학원생들이 국내외 대학과 연구소에 현역으로 재직하며 관련 연구와 산업 발전에 밑거름이 되고 있다.

조 박사는 당시 척박한 연구 환경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학술 연구에 있어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그가 서강대학교로 옮겨간 후인 1970년 봄경부터 자생적으로 형성한 ‘통계물리학 수요세미나’는 우리나라 통계물리 학풍의 뼈대를 세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통계물리학 수요세미나’는 토론 모임으로 작게 시작됐다. 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와도 고립되어 있으면 학문적 활동이 침체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매주 수요일 오후 조 박사의 연구실에 모여 논문을 돌려 읽기로 했는데,  모두 5명이 멤버의 전부였다. 매주 한 번씩 갖는 세미나 시간은 참으로 어려운 시간이었다. 2~3주 동안 밤새워 공부한 내용에 대해 조 박사는 수식 한 줄까지 정확히 파악해 조언했다.  제자들로서는 한 치의 방심도 할 수 없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럴 때면 조 박사는 긴장한 제자들에게 항상 같은 말로 격려하곤 했다. “세계적인 학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그 능력은 자네들과 종이 한 장 차이네. 자네들이 한 가지 문제를 붙잡고 끈기 있게 공부하면 그 종이 한 장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네.” 조 박사의 격려는 후학들의 연구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창섭 전남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는 조 박사를 회고하며 “선생님의 말씀은 그 후 연구생활에서 아무리 유명한 학자들을 만나더라도 주눅 들지 않고 대등하게 교류할 수 있는 정신적 밑천이 되었다”고 말했다.

1974년 그는 KAIST 원장으로 취임하며 학교가 도약하고 발전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KAIST가 안정기에 접어들게 된 데에는 조 원장의 역할이 컸는데, 이 같은 공로로 그는 연임에 성공하며 6년간 원장직을 맡기도 했다. 1980년 원장직에서 내려온 그는 정년퇴임 전까지 KAIST에 이어 한양대에서 평교수로 근무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도 그의 학문을 향한 열정은 멈춤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갓 부임한 젊은 교수들처럼 의욕적으로 연구 생활을 했다. 평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그는 학생들에게 항상 새로운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치밀하게 강의를 준비했다. 그의 업적인 고밀도 기체의 비평형 통계역학 분야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관심거리인 최근 연구 동향까지 어느 한 부분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1981년 학술원 회원이 된 후에는  ‘일반물리학’, ‘양자역학’, ‘고체물리학’, ‘수리물리학’, ‘통계역학’ 등 고등학교 물리 교과서와 대학 및 대학원 수준의 통계물리 전문서적을 저술하며 학계 발전을 이끌었다.

그가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 남겼던 ‘이론 물리학을 하는 길’이라는 글은, 이후 많은 후배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하며 지적 자극제가 되고 있다. 후학들을 사랑하며 보살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학계의 참 스승. 그런 그의 열정에 정부는 과학기술유공자의 이름표를 헌정했다. 한국 현대과학의 여명기에 태어나 학자로서, 한국 물리학 발전의 기틀을 다지는 데 한평생을 바쳤던 조순탁 박사.  그가 보여줬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온화한 인품은 후학들에게 사표(師表)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가 걸어온 물리학의 길. 이제는 그가 사랑해마지 않았던 후학들이 길을 밝혀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