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스토리 뉴스

스토리 뉴스

한국과학에 별빛을 비추다 - ⑰ 故 이원철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⑰ 우리나라 천문·기상 연구와 교육의 시조 故 이원철 국립중앙관상대 초대대장

독수리자리 에타별이 맥동변광성임을 증명한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 일제 치하, 전쟁 등 국가적 재난기에 대한민국 기상과 천문업무의 기틀 마련

일 년 365일, 밤하늘을 영롱하게 장식하는 은하수. 한여름 밤의 은하수는 색다른 장관으로 우리에게 특별함을 선물한다. 은하수가 가장 높이 떠오르는 여름밤은 하늘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로, 지금껏 보지 못했던 별들의 반짝임이 절정에 이르러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 중 독수리가 날개를 펼친 형상의 독수리자리는 은하계 안쪽에 놓여 밝은 별들이 많다. 잘 알려져 있는 견우별(알타이르)은 태양보다 약 8배의 밝기로 맨 눈으로도 관찰할 수 있어 옛 사람들에게 많은 상상의 꺼리를 주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박사인 故 이원철 박사는 독수리자리를 이루는 별들 중 하나인 에타별이 시시각각 밝기가 변한다는 사실을 최초로 발견했고,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우리 민족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의 빛을 선사했다.

1896년 8월 서울에서 태어난 이 박사는 탁월한 기억력과 빠른 계산능력으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다. 그는 어린 시절 서울 YMCA의 여러 프로그램에 참가해서 배움과 경험을 쌓았는데, 이때 배운 경험은 그가 성인이 된 뒤에도 큰 도움이 됐다. 이후 이 박사는 보성고등학교와 선린상업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뒤, 1915년 연희전문학교 수학 및 물리과(이하 수물과)에 입학한다.

그는 연희전문학교에서도 발군의 실력으로 인정받았다.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그는 학생 강사라는 신분으로 3학년 때부터 2년간 학생들을 대상으로 통계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수학 교수도 풀지 못하는 문제를 여러 차례 해결해냈다.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919년 연희전문학교를 1회로 졸업한 후에도 2년간 모교에 남아 수학 강사로 일했다.

집안 형편이 좋지 못했던 그가 미국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재능 덕분이었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잠시라도 강의를 맡았던 미국인 교수들은 하나같이 그를 높게 평가했고, 특히 천문학 과목을 강의한 물리학자 벡커 교수(A. L. Becker)와 천문학자였던 루퍼스(W. E. Rufus) 미시간대학교 교수는 그가 미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도록 도왔다. 앨비언 칼리지(Albion college) 4학년으로 편입한 이원철 박사는 몇 개월 만에 학부 과정을 마무리하고, 
이어 미시간대학에서 천문학으로 석사학위(1922)와 박사학위(1926)를 취득했다. 한국인 최초 이학박사의 탄생이었다.

이 박사의 졸업논문은 독수리자리 에타별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정교한 분광학적 관찰과 계산을 통해 그 별이 팽창과 수축을 되풀이하면서 밝기가 변하는 맥동변광성(脈動變光星)임을 밝혀냈다. 당시 이 가설을 입증하기 위한 연구들은 많았지만 직접적으로 학문적 성과를 낸 것은 이 박사가 처음이었다. 그가 이룬 학문적 성과는 국내 언론에 소개됐고, 당시 일제식민지 치하의 국민에게 큰 위로를 주었다.

1926년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 박사는 곧바로 귀국했다. 미국 천문학계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그에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한국의 과학을 이끌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었다. 당시 이 박사가 연구한 이론은 미국에서 학계의 주류로 각광을 받았지만,
식민지 상황이었던 한국에서는 연구를 이어갈 수 없었다. 귀국하자마자 연희전문학교의 교수로 부임한 그는, 연구 대신 교육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열정과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수학과 물리학, 천문학 등 여러 강좌를 담당했다. 당시 이 박사가 이끄는 연희전문은 전문적인 천문학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었다. 그는 국내 천문학의 기반을 다지고 체계적인 교육기관을 구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28년에는 국내 최초로 연희전문 천문대에 현대식 굴절망원경을 설치해서 실제적인 천문학 강의를 열기도 했다. 이 박사는 이 망원경을 무척 아꼈는데 1942년 일본이 전시 물자로 징발해서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던 중 1929년에 ‘삼천리’에서 이 박사가 독수리자리 에타별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으로 오보하면서 국내에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 보도는 실제 사실과는 다른 것이었지만,그는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국민들에게 우리 민족의 우수함을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존재였다. 이 박사는 서울 YMCA에서 일반인을 위한 정기적인 대중강연 등을 통해 
과학을 널리 알리는데 앞장섰다. 그가 진행하는 ‘목요 강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으며, 이 강연은 과학의 대중적 확산에도 상당한 공헌을 했다.

1935년에는 안식년을 맞아 한국에 들어온 스승 루퍼스 교수를 도와 한국천문학사를 집필했다. 루퍼스는 1년 간의 연구결과를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회의 잡지에 ‘Astronomy in Korea’라는 제목으로 발표했고, 말미에 이원철 박사의 도움을 감사인사로 남겼다.
이 논문은 고대에서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전통 천문학을 개관한 것으로 34장의 관련 유물사진도 담고 있다.

그러나 이원철 박사는 1938년, 12년 동안 헌신한 연희전문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연희전문을 압박하고 있었는데, 이 박사는 독립운동 단체였던 흥업구락부 가입이 빌미가 되어 학교를 떠나게 되었고, 이후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해방 전까지 활동을 이어가지 못했다. 1941년 교수가 아닌 직원 신분으로 연희전문에 복직했지만,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의 요주의 인물로 지목당해 다시 사임했다.

이원철 박사는 해방을 맞이하자 연희전문의 재건에 참여하는 한편,본격적으로 천문 기상학 발전을 위해 나섰다. 이 박사는 군정 치하에 있던 일제의 기상대를 인수해 관상대장으로 부임, 이를 국립중앙관상대로 발전시켜 대한민국 기상과 천문 업무의 기틀을 마련했다. 일제에 의해 유입된 천문 기상 관측법을 우리식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도 이 박사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는 가장 먼저 관측과 예보, 통계를 담당하는 기상 부서와 천문학의 기본이 되는 역서를 편찬하는 천문과를 설치해 기상학과 천문학 재정립을 시작했다. 또 천문 부서의 유일한 직원인 천문 과장과 함께 직접 천문 역서를 제작해 배포하는 작업도 도맡아 했다.

역서 편찬 작업은 그가 중점적으로 추진한 사업 중 하나였다. 한국 사회는 양력 역서가 일본이 들여왔다는 반감 때문에 음력 역서를 맹목적으로 선호했다. 이 박사는 음력 역서를 재래의 관습으로 여기고 과학적인 농업을 위해 전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61년 관상대 대장으로 마지막 역서를 발간할 때까지 태양력의 과학성을 알리는 역리 계몽운동을 적극 시행했다.

또 관상대 직원들을 중심으로 1947년 3월 한국기상학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현재의 한국기상학회는 1963년 12월 창립됐으나, 이 박사가 조직한 한국기상학회는 현재 기상학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여건상 학회지를 펴내는 등의 학술 활동을 수행하진 못했지만,
‘기상 연구를 돕고 그 진보를 기도하며, 국내외 관계학회와 협력하여 학술문화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했던 학회의 뜻에 동참하는 회원들이 많았다. 또 우리나라 최초 공과대학인 인하공과대학 창설 과정을 주도하며 초대 학장으로서 신설 대학의 기초를 닦았다. 그는 열악한 국내 교육 여건 속에서도 대학 교육과 YMCA 재단 이사장을 역임하고 
대중 과학강연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열정과 재능을 기부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고 본인이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한 YMCA에 특별한 애착이 있었다. 이 박사는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경기도 양평군 임야 3만 6천여 평과 거주하던 갈월동 가옥을 YMCA에 기증하며 마지막까지 사회봉사를 몸소 실천했다. 이 박사의 아내 김화순 여사 역시 남편의 모교 사랑을 헤아려 장례식에 모인 조의금을 연세대학교 장학금으로 기부했고, 그가 소장했던 도서 300여 권은 건국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했다. 부인이 홀로 10년을 살다 기증한 갈월동 가옥은 현재 YMCA의 강남지회 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이 박사의 호를 붙인 ‘우남홀’이 있다.

2002년 한국천문연구원이 발견한 소행성 ‘2002DB1’의 정식명칭은 ‘이원철’. 후배들은 이원철 박사를 밤하늘의 별로 기록했고, 정부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의 명예를 헌정했다. 

이 박사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 민족적 자긍심을 높였던 천재 과학자였다. 12년간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천문학 교육에 힘썼고, 해방 이후에는 관상대 초대대장으로 15년 이상 일하면서 기상학 발전의 기틀을 닦았다. 과학자로서 그의 연구는 박사학위 논문 이후 계속되지 못했지만, 천문학과 기상학의 토대를 쌓은 그의 업적은 그 이상의 감동을 안겨주었다. 
자신의 삶을 나라에 헌신한 이원철 박사. 그의 삶은 그가 공부했던 암흑시대의 별처럼 외로웠지만, 한없이 아름다웠다고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