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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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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화학의 싹을 틔우다 - ⑱ 故 안동혁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⑱ 해방 후 우리나라 응용화학계를 이끈 지도자 故 안동혁 한양대 명예교수

공업용수조사로 조국의 공업화에 기여 상공부 장관시절 3F 산업정책으로 한국 경제 발전 토대 마련

해방 이전 일제는 조선인 고급 과학기술 인력의 배출을 억제했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에는 과학기술자가 절대 부족 상태였다. 과학기술분야에서 대학을 졸업한 인재는 300여명, 조선인 박사학위 소지자는 12명이 전부였다.해방과 함께 맥아더 장군은 '일본이 물러간 기관은 
조선인들이 접수해 질서를 잡으라'는 전단지를 뿌렸는데, 몇 안 되는 과학기술인들이 연구소를 접수하는 주역으로 활동해야 했고, 비슷한 역할을 학계에서도 해야 했다. 
그러나 국가의 과학기술 지원시스템이 부재한 탓에 도대체 연구를 수행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곧이어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많은 교수진이 사망하고 비교적 유능한 과학자들이 월북하며 상황은 더 어려워졌다. 그러나 당시 과학기술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과학기술 연구개발의 기틀과 부국을 위한 산업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한국화학계의 선구자로 꼽히는 故안동혁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역시 그 중 한 사람. 아무것도 없었던 그때, 그의 선구안은 대한민국 화학 연구·교육·산업의 토대를 만들었다.

안동혁 교수는 어려서부터 영특했다. 1907년 서울 왕십리 태어난 그는 1918년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입학, 수석으로 졸업했다.그는 특히 과학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서 궁금한 점이 있으면 교사를 찾아가 물어보거나 집에서 혼자 실험을 해보아 직성이 풀렸다. 그러다 1919년 3·1운동을 겪으며 민족주의자들의 실력양성운동에 감화를 받았고,
과학분야 중에서도 현대생활의 기초가 되는 공학기술을 공부해보고자 경성고등공업학교(현 서울대 공과대학의 전신)에 진학했다.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모인 경성공전에서도 그는 1등을 놓치지 않았다. 1926년 경성공전을 수석으로 졸업한 안 교수는 일본의 규슈제국대학 공학부 응용화학과에 진학해 유지공업(油脂工業)에 대해 연구했다. 4년 뒤 대학을 마친 그는 곧바로 귀국해 모교인 경성공전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1933년부터 중앙시험소 화학공업부의 기수로 부임해 강의와 연구를 병행했고, 
화학공업부장, 총독부 식산국 기사 등을 맡았다. 안 교수는 조선인으로는 매우 드물게 승진을 거듭, 고등관 4등에 오르며 같은 직종의 일본인들보다 우수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해방 전까지는 화학공학에 대한 연구와 강의에만 몰두했다. 학생들에게는 유지공업과 공업용수, 고무공업, 인조섬유 등을 가르쳤고, 중앙시험소에서는 유지 연구를 진행해 
‘비누제조법’, ‘염화 고무제조법’, ‘수지추출방법 등 6개의 특허를 냈다. 또 ’油脂로부터 폴리아미드系‘, ’유지에스테르 교환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하며 지방산계 폴리아마이드의 합성연구 결과를 널리 알리기도 했다.

중앙시험소에서 진행했던 안동혁 교수의 연구 중 가장 중요한 성과로 꼽히는 것은 공업용수조사다. 그는 1937년부터 1944년까지 영등포, 부산, 군산, 이리 등의 지역을 중심으로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전국을 대상으로 지하수의 수질과 수량, 지질상태 등에 대해 조사했다.
굉장히 방대했던 연구로서 장차 공업화에 대비한 기초조사의 성격을 갖고 있다. 다행히 공업용수조사가 마무리될 시점 광복을 맞게 됐고, 해당 조사사업은 13편의 논문으로 재간행되어
이후 우리나라 공업 발전을 위한 중요한 기초정보가 됐다.

해방 후 안동혁 교수는 중앙시험소를 접수하여 중앙공업연구소로 재편하고,경성공전을 재건하는데 일조하며 한국 공업발전의 미래를 준비했다. 그는 1945년 9월 중앙시험소 소장, 경성공전 교장으로 부임해 한국인 기술자들을 영입하며 기술인력 부족 현상 해결을 위해 힘썼다. 
또 중앙시험소가 1946년 3월 상공부 중앙공업연구소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공업기술 종합연구기관의 외양을 갖출 수 있도록 기계공작부와 식품공업부를 신설하고, 전기화학부를 무기화학부로, 화학공업부를 유기화학부로 바꾸는 등의 변화를 꾀했다.

당시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하나, 국가의 산업 발전이었다. 그가 해방 후 바로 미국행을 택한 것도 이 이유 때문이었다. 안 교수는 1948년 7월부터 1950년 6월까지 2년간 미국 프린스턴대학의 연구원으로 파견되어 선진국들의 연구소, 공장, 대학 등을 방문하는 등 과학기술과 공업경제를 두루 살펴보고 이해하는 중요한 경험을 체득했다. 귀국 후 그는 선진국을 벤치마킹해 중앙공업연구소의 과학기술도서와 기자재들을 보존하는데 주의를 기울이는 한편, 국방부의 요청으로 원산의 흥남공업단지를 시찰하며 북한의 공업 현황을 살펴보기도 했다.

일생의 대부분을 연구와 교육에 힘썼던 안 교수이지만, 해방 후에는 행정가로서 과학기술 여러 분야에서 큰 몫을 담당했다.특히 1953년 상공부 장관에 발탁된 그는 재임하는 동안 전문 기술자들을 양성하고 기술개발을 촉진하는 등 우리나라 공업발전의 기초를 닦았다. 
전쟁으로 황폐화된 공업시설을 복구하고 경제를 재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이 시기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안 교수는 상공분야의 권위자들을 영입해 전후 공업 건설을 계획적으로 추진할 방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안 교수의 공업화 정책은 자립경제의 관점에서 공업건설을 추진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를 위해 안 교수는 공업진흥의 기본 요건으로서 자금(Fund), 비료(Fertilizer), 에너지와 연료(Force or Fuel)를 일컫는 이른바 ‘3F 정책’을 내걸었다. 공업화를 위한 자금과 공장을 가동할 에너지, 식량증산에 비료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일제시대에 발전 설비가 주로 북한에 편중되었던 데다가 6·25전쟁으로 파괴돼 한국의 발전설비는 절대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는 소비재의 도입에만 사용되던 원조 자금을 이용해 산업 시설 건설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3F 정책에 의해 추진된 전력 확보 및 비료, 판유리, 시멘트, 철강 등 주요 기간산업의 건설은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경제개발의 토대가 됐다. 원조와 수입에만 의존하던 물품을 국산화해 수입대체 효과를 얻었고, 공장의 건설과 운영 과정에서 양성된 능력있는 기술인력들은 
산업화를 주도하는 핵심인력으로 성장하게 됐다. 아울러 전후 열악한 전력난을 해결하고자 
당인리 제3호기, 마산화력, 삼척 제1호기 등 3개의 화력발전소의 건설을 추진하며 부족한 발전 용량을 보충하는 데 노력했다. 이승만정권의 공업화 정책은 안 교수가 정립한 내용을 토대로 진행됐으며, 그가 마련한 상공부 부흥계획은 경제개발의 초석이 됐다.

안 교수는 해방 이후 과학기술단체의 지도자 역할을 도맡아 했다. 혼란스러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학술원, 조선공업기술연맹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경성공전 출신 기술자들을 모아 각종 기술협회를 조직했다. 상공부장관을 사임한 후에는 과학기술단체들을 설립하고 지도하는데 힘을 썼다. 그는 학술원 초대 회원 및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학계의 위상 강화와 국제적인 학술교류 등을 추진했으며, 대한요업협회, 한국과학진흥협회, 한국화학공학회 등 
여러 학회의 회장을 맡으며 대한민국 화학공학 협회 활동의 기틀을 다졌다. 
또 한국과학원, 한양대 산업과학연구소 등 기관의 초창기 발전에도 기여했다.

과학기술 진흥이 곧 국가의 부흥이라고 믿었던 그에게 과학기술 대중화 운동은 평생 가장 중요한 임무일 수밖에 없었다. 1930년대부터 과학대중화 운동에 참여해왔던 그는 해방 후 ‘과학시대(1946)’라는 대중 과학잡지의 간행을 돕고, 학생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국한문으로 된 ‘화학공업개론(1964)’과 ‘자연과학개론(1971)’을 편집해 저술했다. 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의 일간신문과 잡지에 많은 칼럼을 써 일제강점기부터 과학기술의 대중적인 보급을 위해 큰 힘을 쏟았다.

“과학이란 세분해서 정밀하게 공부해야 하는 건데 외야에서만 돌면 안 돼.
그래서는 골인할 수가 없지. 젊어서 그런 딴짓 많이 하느라고 시간 다 보냈어.정글을 헤매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그렇게 태어났으니 어떻게 해. 후회도 많이 하면서 공부하는 친구들에게 이러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어.”
- 우리 화학계의 선구자 중

그는 한때 스스로를 ‘과학종(科學宗)’이라고 일컬었을 만큼 과학의 힘을 신봉했지만 학자로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는 매우 겸손했다. 그는 학문을 존중하고 좋아하지만, 그 주변만 빙빙 돌기만 했다면서 스스로를 구경꾼이라고 칭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를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천생 과학자로 기억한다. 1958년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교수로 돌아온 그는 후학양성에 공을 들였으나 1972년 고혈압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말년에는 종교와 철학 등에 심취했지만, 명료한 기억력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를 구술하고 기록해 한국과학사에 의미 있는 사료를 남겼다.

과학기술을 통해 조국의 미래를 설계한 선구자, 안동혁 교수. 정부는 안 교수의 과학대중화 활동과 중공업 발전의 기반을 닦은 공로를 인정해 ‘과학기술유공자’의 명예를 헌정했다. 자신보다 국가를 위해 삶을 헌신했던 과학자 안동혁의 이름은 대한민국 대표 화학공학자로서 역사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