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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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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위대한 생명을 탄생시키다 - ㉕ 정길생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㉕ 우리나라 동물생명공학의 개척자 정길생 전 참행복나눔운동 이사장

독창적인 가축생산 기술체계 정립해 축산업 경쟁력 제고에 기여 국내 최초로 사람 난자의 시험관내 수정기술 개발해 전수

해방 직후, 한국의 생명공학은 육종 연구를 비롯한 먹거리 품종개량에 치우쳐 있었다. 지금과 다르게 한 톨의 쌀이 귀했던 시절, 무엇보다 중요했던 건 그 시대의 사람들이 겪고 있던 배고픔을 해결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첨단기술이 난립하고 있는 오늘날의 생명공학은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해결해 줄 가장 적합한 학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동물생명공학은 축산업의 블루오션으로 불리며 무한한 잠재력을 내뿜고 있는데, 점차 국민 먹거리 창출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평가되며 주목받고 있는 상황이다. 정길생 박사는 일찍이 동물생명공학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초기 연구활동에 매진했던 과학자였다. 그는 동물생명공학이라는 개념이 생소했던 시대에 국내에 최초로 소개하며 학문을 전파한 동물생명공학의 창시자이자 개척자였다.

정길생 박사는 1941년 경상남도 산청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험준한 지리산 지형에서도 벽지에 속한 곳이었는데, 끼니를 해결하기 힘들 정도로 가난한 농가들이 모여 사는 시골 마을이었다.  
가난한 집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 그는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랐는데, 그 덕분에 집안에서 유일하게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제일 우수했던 정 박사를 졸업시키기 위해 다른 형제들은 
학교를 다니던 도중 그만둬야 했다. 부모님의 결정이었다.

집안 형편은 어려웠지만, 부모님은 정 박사와 형제들을 엄하게 가르쳤다. 자신들 이름 석 자도 쓸 줄 몰랐던 부모님이었지만, 7남매를 향한 애정과 교육에 대한 열의는 그 무엇에도 뒤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글자도 모르는 분이셨지만, 인품을 길러주시고 나아갈 길을 가르쳐주신 인생의 가장 큰 스승이셨어요.” (네이버캐스트 인생스토리 ‘정길생’ 중)

정 박사는 법관을 꿈꿨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갈 돈도 없었던 그에게 법관은 참으로 먼 나라 이야기였다. 건국대학교 축산학과의 장학생 모집 공고가 붙은 게 바로 그때였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 숙식은 물론 졸업 후 유학까지 보내준다는 내용이었다. 사면초가였던 그에게 그 조건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농사일에 시달렸던 그는 축산에 관심이 없었다. 
농사일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달리 대안이 없었던 그는 축산학과에 들어갔지만, 법관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정 박사는 졸업 후 외국으로 유학 갈 때까지 법률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마음을 잡은 건 일본 교토대학 유학 시절 때였다. 박사과정의 책임감은 석사과정에서 겪은 것 이상으로 무거웠다. 고시의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그는, 판단이 서자마자 깨끗하게 포기하고 연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축산학에 정을 주지 않았던 시간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무섭게 몰입했다. 그때 이후로 그는 축산학을 통해 판사나 검사, 변호사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70년대 일본은 선진 농업 기술의 요람으로, 덴마크와 비견될 정도였다. 일본에서 현장 실습을 수행했던 정 박사는 세계적 석학으로 명성이 높았던 니시카와 교수를 만나 ‘가축번식학’을 접하게 된다. 가축번식학은 축산학의 한 분야로, 당시로선 특수 분야에 속했다. 그는 경종농업(씨를 뿌려 작물을 재배하는 농업)이 발달했던 우리나라에서 동물농업이 발전하려면 가축번식에 대한 생리를 잘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당시 진행한 연구는 동물의 수정 능력 획득 인자를 발견해 어떤 화학적 구조를 갖는지를 밝혀내는 것이었다. 
선구자가 없었던 미개척 분야였기에 진척은 더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생명 탄생의 비밀을 풀려면 수정 능력과 관련된 연구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방바닥에 등이 닿는 일이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연구에 빠져들었다. 성과를 인정받은 그는 1973년 박사 학위 취득 후 곧바로 귀국하여 모교에 교수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동물생명공학과의 인연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학교는 가축번식학을 전공한 그에게 유전공학에 속하는 동물생명공학을 맡겼다. 세분화된 학문 분야에 가장 적합한 전문가로 인정받았던 게 이유였다.
사실 그때만 하더라도 동물생명공학에 대한 개념이 생소할 때였다. 정 박사는 학문의 개념과 내용, 연구방법 등을 국내에 최초로 소개하며 동물생명공학을 알리는 데 힘썼다. 
가장 좋은 홍보 수단은 그의 연구 성과였다. 정 박사는 국내 최초로 포유동물의 난자를 이용한 수정란이식의 기초이론과 기술을 도입해 동물생명공학 시대의 전기를 마련한다.

축적된 연구를 바탕으로 정 박사 연구팀은 1983년 두산개발과 함께 젖소 수정란을 한우에 이식, 3마리의 젖소 송아지를 출산하게 하는 데 성공하며 국내 동물생명공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정 박사는 기초연구를 통해 얻은 이론과 기술들을 현장에 적용해 독창적인 가축생산 기술체계를 정립해 나갔다. 그가 개발한 첨단기술은 우리나라 축산 농가의 소득증대와 국가 농업 경쟁력 제고에 큰 도움이 됐다.

그의 기술은 가축에만 해당되지 않았다. 정 박사는 불임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 대표적인 과학자이기도 했다. “1970년대 말에 미국 위스콘신주립대학에서 동물발생공학을 연구하고 있었어요. 
그때 같이 연구하던 한 영국 학자가 제게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는 사람에게 수정 이식을 한다고 얘기를 해주더라고요. 왜 사람에게 수정 이식을 하는지 물어봤더니, 불임 환자가 많다는 게 이유였죠. 알아보니 우리나라도 여성의 12%가 불임 환자였어요.”
- ‘산업실록’ 정길생 박사 인터뷰 중 -

호기심이 생겼다. 
그는 자신이 연구했던 수정란이식 기술을 사람에게 적용하면 우리나라에서도 불임을 해결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 시기, 영국에서는 세계 최초의 시험관 아기가 탄생했다. 
1978년의 일이었다. 시술 내용을 자세히 살펴봤지만 특이한 건 없었다. 약간만 다를 뿐, 정 박사가 알고 있던 내용과 비슷했다. 자신감이 생긴 그는 국내 의사와 협력해 체외 수정 기술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체외 수정을 통한 시험관 시술은 난임, 불임 부부에겐 마지막 희망이었다. 100% 자신이 있었지만, 환자들을 향한 심적 부담감은 날로 커져만 갔다. 시험관 안에서 수정이 된다고 해도 임신이 될 확률은 20% 남짓이었지만, 환자들의 기대는 너무 컸다. “세 번을 시도했는데 안 된 분이 계셨어요. 
그랬더니 내게 자기 책임이라고, 죄송하다면서 밖에선 우시더라고요. 너무 가슴이 아파서, 그날로 손을 끊어버렸어요.” ‘산업실록’ 정길생 박사 인터뷰 중 -

이후부터 그는 의사들에게 기술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수정기술을 전혀 모르는 의사들에게 이론과 기술을 가르치고, 
불임센터가 개설되면 연구팀에서 훈련된 대학원생들을 파견해 지원했다. 그 결과 1985년 서울대병원에서 장윤석 박사팀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이자 세계 18번째인 시험관 아기가 태어나면서, 정 박사가 개발한 수정기술의 효력을 입증하게 된다. 오늘날 그의 제자들은 전국 병원의 불임센터에서 시험관아기생산 실무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그는 1973년부터 33년간 건국대 축산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82명의 석사, 40명의 박사, 6명의 박사후과정생을 배출하는 등 스승의 역할에도 충실했다. 또한, 그는 연구를 수행하면서 국내외에 392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생명공학에 관한 18권의 전문서적을 발간해 대학 교재로 보급하는 등 동물생명공학 교육수준의 향상과 사회의 과학기술 마인드 제고에 기여하는 데 노력했다. 
이외에도 그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으로서 과학 선진국 한림원들과의 학술교류 협정을 체결하며 상호 공동연구와 공동 학술행사를 실시하는 체제를 정립함으로써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달의 촉진과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힘쓰기도 했다.

참행복나눔운동의 일원으로도 활동했던 정 박사는 따뜻한 세상의 실현을 위해 우리 각자가 해야 할 몫이 있음을 강조했다. 과학기술유공자의 명예도 그가 해야 할 역할의 무게일 뿐이다. 그는 바란다. 자신의 삶이 젊은이들에게 격려와 위로가 되기를 말이다. “어두운 밤의 작은 반딧불처럼, 
나눔 운동이 희망의 불빛이 되기를 염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