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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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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화학자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다 - ㉖ 故 이태규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㉖ 화학 연구와 교육 기반 구축에 기여한 대한민국 최초 화학박사 故 이태규 KAIST 명예교수

’리-아이링 이론‘으로 전 세계에 이름 알리며 한국 화학자의 위상 제고 한국 화학발전을 위해 ’조선화학회‘ 결성하며 연구 풍토 활성화 지원

우리 과학의 역사는 참으로 지난했다. 식민지 조선을 억압했던 일제의 정책으로 인해 과학을 접할 기회조차 차단당한 시간이었다. 배움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학문에 대한 호기심도 사치였던 그 시절, 탁월한 과학자들의 등장은 그 존재만으로도 힘이 됐다. 그 중 한국 최초의 화학박사인 이태규 박사는  
프린스턴대학교 유학 당시 여러 연구 이론을 발견하며 한국 화학자의 위상을 높인 과학자다.

이태규 박사는 1902년 충남 예산에서 아홉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세상 물정에 밝았던 선친의 가르침으로 근대교육을 받았던 이 박사는 남들보다 어린 나이에 청강생의 신분으로 예산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나이 많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단연 성적이 우수해 정식학생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월반을 거듭해 4년 만에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도지사의 추천으로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무시험 입학할 만큼 영특함을 인정받았다.

경성고보에 진학할 때만해도 그의 꿈은 소학교 교사였지만, 이 박사의 뛰어난 재능을 눈여겨본 일본인 교사 호리 마사오는 그를 자신의 실험 조수로 발탁하며 화학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게 했다.
방과 후, 호리 교사의 실험 준비를 돕던 이 박사는 산소 제조와 같은 화학 반응에서 촉매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았는데, 훗날 이 박사는 이때의 기억을 일컬어 ’과학의 놀라운 세계에 흥미를 갖게 됐던 기억‘이라고 회고했다.

호리 교사는 한국인이었던 이 박사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열심히 공부만 하면 세계적인 화학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스승의 응원에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1920년 호리 교사의 추천으로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에 관비유학을 가게 된 이 박사는 차석으로 졸업하며 호리 교사의 응원에 보답한다. 
그러나 이 박사는 사범학교를 졸업했음에도 조선인 차별로 인해 관립 고보의 교사로 부임하지 못했다. 이 박사는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기회 삼아 교토제국대학 화학과에 입학한다. 
화학자의 꿈에 성큼 다가간 순간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부터 그는 학업에만 전념했다. 이 박사의 지도 교수였던 호리바 신기치는 물리화학 분야에서 저명한 교수였다. 호리바 교수는 이 박사의 능력이 좀 더 발현될 수 있도록 연구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이 박사의 졸업논문은 지도교수와 공동명의로 저널에 게재됐다.  이 박사는 졸업 후에도 학교에 남아 연구를 계속 진행했다. 그가 당시 빠져있던 연구는 촉매 화학 분야였다. 이 박사는 ’환원 니켈 존재 하에서의 일산화탄소 분해‘라는 연구 주제로 1931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이는 한국 화학자 최초의 이학박사 학위다.

박사였음에도 그를 불러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박사는 학위 취득으로부터 7년간 연구실 조수와 시간 강사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연구는 쉬지 않았다. 온갖 차별에도 불구하고 그의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마침내 1937년, 그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교토제국대학교의 조교수가 된다.
식민지 출신의 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발표한 논문이 18편으로 가장 많았고, 그의 뛰어남을 알고 있었던 호리바 교수가 ”학문에 민족이 따로 있느냐“며 이 박사의 조교수 임용을 관철시켰던 것이 주효했다.

호리바 교수는 촉매 연구 권위자로 올라선 이 박사에게 선진 외국으로 눈을 돌리도록 조언했다. 그가 미국 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였다. 무엇보다 다른 나라에 가서 연구 경력을 좀 더 쌓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 박사가 선택한 프린스턴대학교는 촉매연구의 권위자인 테일러(Hugh S.Taylor) 박사를 비롯해 양자화학의 거장 헨리 아이링(Henry Eyring) 박사, 물리학 천재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박사 등 세계적 석학들이 모인 최고의 상아탑이었다. 이 박사는 그곳에서 평생의 인연이 될 헨리 아이링 교수와 함께 촉매, 점성이론, 액체구조론, 반응속도론 등의 연구에 몰두했다.

이 박사와 아이링 교수는 1940년 쌍극자 능률 계산에 관한 논문을 공동으로 발표했다. 그들은 이 논문에서 니트로화 분자 내의 전하 분포를 계산하는 데 성공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프린스턴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자극이 됐다. 여러 석학들과의 교류는 젊은 학자였던 이 박사의 인식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의 초대 문리대 학장이 된 그는 일본에서 가르쳤던 후배들을 불러들였다. 김순경, 김용호, 김태봉, 이종진, 최상업, 최규원 등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로 교수진을 정비한 그는 서울대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서울대는 국대안 파동으로 좌우 이념 대립이 극단적으로까지 치닫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는 한국의 화학 발전을 위해 조선화학회(현 대한화학회)를 결성한다. 1946년 화학 연구 풍토 활성화를 위해 국내 화학자들을 모은 그는 초대회장으로 취임하며 화학 학문의 기반 구축을 도모했다. 조선화학회는 우리나라 과학계에서 가장 먼저 창립된 학회로 우리나라 화학발전의 초석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국내 학계에 혼란과 분쟁의 나날이 계속 이어지자, 그는 본업인 학자로 돌아가 연구에 매진하기로 결심했고, 1948년 동료 아이링이 대학원장으로 재임 중이던 유타대학으로 두 번째 미국 유학을 떠난다.

이 박사의 두 번째 유학은 25년간 이어졌다. 한국 상황이 안정되면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한국 전쟁이 발발하며 체류 기간이 길어졌다. 한국에 두고 떠나온 가족이 걱정돼 불안했지만, 그래도 그는 마음을 다잡고 연구에 전념했다. 유타대학에서 아이링 교수와 이룬 업적은 가히 세계적이었다. 1955년 이 박사와 아이링 교수는 각자의 성을 딴 ’리-아이링(Ree-Eying) 이론‘으로 유명한 ’비뉴턴 흐름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한다. 분자점성학의 기초가 된 이 논문은 뉴턴의 역학이 적용되지 않았던 분자세계를 방정식으로 수식화한 것이 특징이다. 이 박사는 이 논문으로 1958년 미국화학회 공업화학분과의 최우수논문 표창을 받으며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에도 그는 ’울트-파라 효과‘, ’표면복합물이론‘ 등의 연구결과를 연이어 발표하며 세계적 화학자로 명성을 얻게 된다. 이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그는 1965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 후보 추천위원으로 발탁되며 한국 화학자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는 연구에 대한 욕심이 남달랐다. 비판과 경쟁을 학문의 필수요소로 생각했던 그는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연구를 탐했다. 1973년까지 그가 발표한 논문만 자그마치 150여 편에 이른다.

세계적 화학자로 명성을 얻은 그는 유타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한국 학생들을 데려다 지도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시대적 상황으로 귀국하지 못해 미국에 안착한 그가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유타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한국인 과학자만 40여 명 이상, 그중에서도 이 박사가 직접 길러낸 학자들만 20여 명에 달했다. 그들은 교육과 산업 전반에 걸쳐서 한국 과학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1973년 4월, 50년의 긴 세월을 해외에서 보낸 그가 영구 귀국했다. 정부가 해외 과학두뇌 유치 대상자로 이 박사를 선정하며 그를 한국과학원(현 KAIST) 석좌교수로 초빙한 것이다. 희수의 나이에 고국 강단에 선 그는 새로운 마음으로 연구와 교육자의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그는 어느 젊은 과학자들보다 더 철저하게 강의를 준비했고, 연구에 몰입했다. 한국과학원의 교수로 지내는 동안 그는 12명의 박사와 23명의 석사를 길러냈으며, 활발한 연구 활동을 기반으로 80여 편에 달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또한, 한국이론물리화학연구회를 설립해 후학들의 연구의욕을 높이고, 연구풍토를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한국 연구 환경의 수준을 세계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여생을 바쳤다. 후학 양성을 자신의 연구 못지않게 최우선으로 여겼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우수한 연구 인력이 풍부했던 한국 화학계는 다른 분야보다 앞서 발전할 수 있었다.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과학자 최초로 국립묘지 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그가 떠난 뒤에도 학문을 향한 그의 철학은 후학들에게 여전히 귀감이 되고 있다. ”학문하는 사람은 오로지 학문하는 길만 걸어가면 된다. 
자기 일에 충실하다 보면 저절로 수양이 된다. 진정한 과학과 진정한 예술은 결국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