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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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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자물리학으로 노벨상의 보고(寶庫)가 되다 - ㉗ 故 이휘소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㉗ 노벨상 수상에 가장 근접했던 한국의 천재 물리학자 故 이휘소 전 미국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 이론물리학부장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와 ‘참(Charm) 입자’ 연구로 10명의 노벨상 수상자에게 영향
인용 횟수 1만 3,400회가 넘는 논문만 60여 편으로 세계 이론물리학계 선도

매년 10월, 노벨상 시즌이면 온 국민의 이목이 과학계에 집중된다. 대중의 사랑을 목말라하는 과학계의 입장에서는 반가운 이야기지만, 내막은 씁쓸하다. 1901년 처음 수여된 노벨과학상은 지난 117년간 599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국가별로 보면 미국, 영국, 독일 순으로 수상자를 배출했는데, 아시아권에서는 일본이 가장 많다. 이쯤되면 늘 나오는 논쟁이 있다. 한국의 노벨상 수상에 대한 희망고문이다. 한국이 노벨상 제로라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희망은 늘 아쉬움을 남긴다. 국민의 바람과 달리 어긋나는 수상의 행방에 과학기술계도 노심초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고 그립다. 아마도 생존해 있었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로 당연히 이름 올렸을 한 명의 과학자, 이휘소 박사의 이야기다.

이휘소 박사는 일제 강점기 시절이었던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독서를 좋아했던 그가 특히 탐독했던 건 주로 과학에 대한 책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어린이 과학’ 잡지를 즐겨보곤 했다. 화학에 특히 관심이 많았던 이 박사는 공부방 구석진 곳에 작은 실험실을 차려놓고 책에서 나온 실험들을 따라 하며 과학에 대한 흥미를 키워나갔다.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자 가족과 함께 마산으로 피란을 간 그는 그곳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해 1952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대학의 학과 수업은 그의 기대만큼 흥미롭지 않았다. 지나치게 응용화학에만 치우쳐 있던 학과 공부에 실망한 탓이었다. 응용보다 이론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자연스럽게 물리학에 빠져들었고, 
거의 독학으로 양자역학을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날 양자역학 원서에서 계산이 이상한 문제를 발견한 그는 저자가 근무하는 대학으로 자신의 의견을 적어 편지를 보낸다. 
저자로부터 ‘당신의 지적이 맞다’라는 답장을 받은 그는 크게 기뻐하며 
물리학으로의 전향을 결심한다.

그러나 문리과대학에 속해있던 물리학과로의 전과는 불가능했다. 낙담한 그에게 기회는 느닷없이 찾아왔다. 
이 박사는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 장교 부인회가 후원하는 유학생 선발 시험에 당당히 합격하며 미국 유학의 기회를 거머쥐었다. 1955년 1월 도미한 그는 오하이오주의 마이애미 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Benjamin Whisoh Lee’, 줄여서 ‘벤 리’로 불렸다.

그의 유학 생활은 공부로 시작해 공부로 끝났다. 과목마다 숙제가 많아 늘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학문을 향한 그의 투지는 놀라울 정도였다. 당시 그는 현대대수학 강의를 듣고 있었는데, 수학에 능했던 그에게도 쉽지 않은 과목이었다. 20여 명이 수강했지만, 마지막엔 이 박사 혼자 남았다. 현대대수학의 시험 결과는 A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는 유학 온 지 1년 반 만에 
물리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며 이름을 알린다.

1960년 만 25세에 펜실베이니아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이듬해 펜실베이니아대학 조교수와 프린스턴고등연구소의 연구회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프린스턴고등연구소는 순수 기초 연구를 수행하는 기관으로 아인슈타인, 괴델, 오펜하이머, 파노프스키, 폰 노이만 등 거장들이 다녀갔던 연구소로 유명하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연구회원이 된 이 박사는 그곳에서 ‘(속옷도 안 갈아입어)팬티가 썩은 사람’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밤낮없이 연구실에만 붙어 앉아 있어 생긴 별명이었다.

그의 좌우명은 
“남이 아는 것은 나도 알아야 하며, 내가 모르는 것은 남도 몰라야 한다”였다. 
물리학의 화두를 제시할 수 있는 선도 과학자가 되고자 했던 그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연구하며 학문에 파고들었다. 동료와 점심을 먹다가도 연구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연구실로 들어가서 이틀 만에 한 편의 논문을 완성했을 정도였다. 거의 매달 새로운 논문을 발표했는데, 내놓을 때마다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조교수로 임명된 지 2년 만에 그는 정교수 자리를 꿰차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28세였다. 그 이후에도 그는 구겐하임재단 연구회원, 브룩헤븐 국립연구소 고에너지 물리자문위원, 페르미 국립가속기연구소 이론물리학부장 등 요직을 역임하며 세계 정상급 학자로 우뚝 서게 된다.

그의 가장 큰 학문적 업적은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문제를 수학적으로 해결한 것에 있다. 사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이론물리학에서는 물질의 구조에 대한 이론으로 양자장 이론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1950년대에 이르러 이를 확장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여기에 도입된 이론이 바로 게이지 이론이다. 게이지 이론은 소립자들의 결합과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표준이론으로, 
미시세계의 근본적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 이론의 검증은 현대 물리학의 발전을 크게 앞당기는 데 주효했다.

사실 이 이론은 이 박사가 논문을 발표하기 전인 1967년에 압두스 살람, 스티븐 와인버그, 조지 글래드쇼 등에 의해 제창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론에는 두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하나는 이 이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중성류가 발견되지 않았고, 두 번째는 재규격화가 되지 않아 계산이 불가능한 이론인지 아닌지가 확실치 않다는 점이었다. 1970년대에도 네덜란드의 젊은 과학자 트후프트와 지도 교수였던 벨트만이 수학 지식을 이용해 이 이론이 재규격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증명은 일반적이지 못했다.

이 박사는 이 문제를 끝까지 연구해 일반적인 재규격화 틀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한다. 이 박사는 대칭성이 저절로 깨지는 메커니즘을 이용해 살람-와인버그 모형을 재규격화하는 데 성공하는데, 그가 사용한 범함수 방법은 당시 이론물리학자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방법이었다. 그래서 그는 1972년 발표한 <재규격화가 가능한 질량이 있는 벡터 중간자 이론-힉스 현상의 섭동이론> 논문을 통해 이를 연산자곱 정식화로 쉽게 바꿔 설명했다. 이는 이 박사의 100번째 논문이었으며, 게이지 이론이 본격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한 계기가 됐다. 1973년 <물리비평>에도 실린 이 논문은 이후 모든 소립자 연구자들이 꼭 읽어야 할 필독서로 자리하게 된다.

또 한 가지 업적은 ‘참(Charm)’ 입자의 존재 가능성을 예견했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1974년 8월, 메리 가이아드, 조너선 로즈너와 함께 발표한 <참쿼크를 찾아서>라는 논문에서 모든 물질과 소립자를 구성하는 기본입자 중 c쿼트라는 새로운 입자의 존재 가능성을 예측했는데, 이를 이론에서의 주장뿐만 아니라 실제 구성자의 질량까지 계산해내며 근거를 제시했다. 그 후 그가 예견한 입자가 실제로 발견됐으며, 질량 역시 그가 계산한 바와 일치해 놀라움을 안겼다. 
참 입자에 관한 그의 논문은 고에너지 물리학계의 전설이 됐으며, 지금은 고전으로 널리 알려져 읽히고 있다.

이 박사의 연구는 훗날 10명의 과학자들에게 노벨상을 안겨주었다. 이들의 연구는 모두 이 박사의 연구를 기초로 확립됐거나 검증됐으며, 영향을 받았다. 1979년 와인버그, 살람, 글래드쇼가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이 박사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검증을 통해 그들의 이론이 학계에서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트후프트, 벨트만 역시 1999년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고, 우주를 구성하는 최소 입자인 ‘쿼크’의 비밀을 알아낸 그로스, 윌첵, 폴리처 등 3명의 물리학자도 2004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달성한다. 이밖에도 1976년 참 입자의 질량을 계산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은 버턴 리히터와 새뮤얼 팅의 연구에도 앞서 이론적 기틀을 닦아 놓았던 이 박사의 영향이 있었다.

1979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압두스 살람은 수상 소감에서

그는 우리나라 기초과학 연구 진흥에도 이바지했다. 1974년 미국 AID 차관자금에 의한 서울대 이공계 교육 증진 계획을 적극 지원했고, 이를 통해 국내 대학교육용 기자재 구입과 실험시설을 확충할 수 있도록 도왔다. 당시 미국의 차관 지급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 박사는

이론물리학자로서의 연구 활동이 절정기에 이르렀을 무렵, 그는 하늘의 별이 됐다. 1977년 향년 42세. 거짓말 같았던 교통사고였다. 1977년 6월 18일 중앙일보에 실린 이 박사의 부고 기사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국내 과학자들의 목소리가 실렸다. “한국인으로 노벨상을 탈 수 있는 가장 유망한 과학자였는데…”라고 말이다. 그가 사망한 후 한국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짧은 생애였지만, 그가 보여준 학문을 향한 자세는 후학들에게 본이 되기에 충분했다. 대한민국의 영원한 스타 과학자 이휘소. 그가 미처 일구지 못한 노벨상의 영광을 이루기 위해 후학들의 탐구는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