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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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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화학의 국제적 위상을 높인 열정의 과학자

국내 유기광화학 분야를 개척 및 발전 한국 화학의 국제적 위상을 높인 열정의 과학자 심상철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36 국내 유기광화학 분야를 개척 및 발전 한국 화학의 국제적 위상을 높인 열정의 과학자 심상철 대한민국 유기광화학 역사의 빛을 밝히다

-학력:1962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화학과 이학사, 1967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학(Caltech) 이학박사
    -경력:1969~1971 미국 브루클린공과대학 조교수
    1971~1997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1994~1995 한국과학기술원 원장
    -포상:1981 국민훈장모란장
    1990 한국과학상(화학)
    1991 세종문화상(과학기술)

광화학 반응이 일어나려면 먼저 빛이 있어야 합니다.
    한국 유기광화학 연구의 선구자인 심상철 박사는 빛을 사랑한 과학자였다. 
    쾌활하고 활동적인데다 과학에 대한 열정까지 남달라 늘 남들보다 두 계단씩 앞서 뛰어 다녔던 심 박사.
    그는 남들보다 왜소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형형한 눈빛으로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았던 학문과 마주한 유기광화학 분야의 선구자였다.     
    불모지에 가까웠던 한국 화학계의 학문적 수준을 향상하는 데 마중물이 된 심상철 박사. 
    그는 대한민국 광화학 역사에 빛을 비춘 선도적인 과학자였다.

 심상철 박사의 학창시절 모습
    심상철 박사는 1937년 전라남도 곡성군에 위치한 시골마을에서 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넉넉하지 못한 생활형편에도 그는 큰 도시였던 전주에서 유학하며 학업을 이어갔는데, 이는 어렸지만 비범한 두뇌를 갖고 있었던 아들을 위해 내린 부모의 결단 덕분이었다.    
    1956년 전주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며 전교특별상까지 수상한 그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화학과에 입학한 후부터 본격적인 과학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심 박사가 과학에 뛰어들었던 1950년대는 전쟁 이후로 산업시설이나 자원이 변변치 않았던 때였다. 때문에 교육 환경도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교 인근에 위치한 중앙공업연구소에서 학부실험을 진행했는데, 가열기가 없어서 화로에 숯불을 피워 실험을 했을 정도였다.

seoul national university -> 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
    그러나 열악한 환경도 그의 공부 열정에 장애가 되진 않았다. 
    1962년 서울대를 수석 졸업한 심 박사는 선진국의 앞선 과학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바로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심 박사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이공계 학도들은 나라를 일으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캘리포니아공과대학에서 유기광화학 연구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아이오와주립대학과 브루클린공과대학에서 연구에 매진했다.

그가 연구에 매진하던 그 때, 국내에서는 국가산업 부흥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었다. 
    외국으로의 인재 유출을 막기 위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KIST)와 한국과학원(KAIS, 현 KAIST)이 설립됐고, 해외에 있는 과학자들을 유치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과학원은 국내외 우수 과학기술자 유치의 보루임과 동시에 우리나라 과학기술 전문인력 양성의 전진기지와도 같았다. 
    심 박사 역시 이때 국가의 부름을 받아 한국과학원의 부교수로 부임하며 본격적인 연구 활동을 국내에서 시작했다.

심 박사의 연구가 빛을 발했던 시기가 바로 이때부터였다. 
    그가 전공한 유기광화학 분야는 선진국에서는 이미 중요한 학문 분야로 보편화되어 있었지만, 국내에서는 연구가 전무했었다. 
    유기광화학은 유기화합물과 빛이라는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생물독성 시험과 신약 개발, 촉매 개발 등 다양한 곳에서 응용할 수 있는 가치가 있었다.

심 박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유기광화학 연구를 개척하며 수준 높은 연구 결과를 여러 저명 학술지에 발표했는데, 이때 그가 문제 해결을 위해 사용했던 독창적인 방법, 연구 결과의 기여도 등은 국제 화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관심을 모았다.     
    그가 발표한 논문만 330여 편에 달했는데, 그 중 반 이상이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유명 학술지에 실리며 한국 화학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 세우는 데 기여했다. 
    오늘날 이 분야는 반도체 산업의 발전에 기초가 되는 이론적 배경이 되고 있다.

또한 그는 영국 왕립화학회에서 발행하는 세계적 권위의 학술지 Chemical Communication에 1996년 한국 과학자로서는 처음으로 기획 논문(invited featured article)을 요청받아 “Photochemistry of Conjugated Poliynes”를 게재하기도 했다.     
    2000년대에는 소랄렌계 화합물이 자외선과 반응하여 광독성을 나타내는 현상에 대해 일련의 연구를 수행했는데, 이 연구는 미국 국립보건원(NIH) 산하 국립암연구소(NCI)로부터 독창성을 인정받아 7년 동안 연구비를 지원받기도 했다.
    7년간 연구비 지원

심 박사는 이 같은 업적을 인정받아 한국과학상, 세종문화상, 대한민국학술원상 등을 받으며 한국 화학계의 거목으로 우뚝 서기 시작했다.    
    그는 의욕적 학술연구 활동뿐 아니라 각종 학회활동을 벌이거나 교육계의 굵직한 보직을 두루 맡기도 했는데, 이 모든 것은 우리나라의 화학분야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과학적 신념에 의한 것이었다.
    1991년 세종문화상 시상식 사진
    1999년 대한민국 할술원상시상식 사진

그중에서도 심 박사가 KAIST에 재직 중인 1976년부터 애착을 가지고 운영한 월례 유기화학 세미나>는 대한화학회 분과회 활동의 효시가 됐으며, 
    한일 유기화학 심포지엄>을 통해서는 화학계의 국제교류 활성화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아주 열정적으로 임했던 것은 바로 강의였다. 
    심 박사의 강의는 매우 활력이 넘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수업시간 내내 칠판 앞을 왔다 갔다 하며 정열적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실험을 지속해야 하는 강행군에도 그는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후학들의 어깨를 다독여준 자상한 선생님이자 인생의 조력자였다. 
    그래서인지 많은 동료와 제자들 기억 속의 심 박사는 늘 따스한 과학자로 남아 있다.

그가 KAIST에 재직하며 배출한 100여 명의 제자들은 현재 국내외 학교, 연구소, 산업체 등에서 뛰어난 활동을 하며 화학 연구의 성과를 더욱 빛내고 있다.     
    유창한 영어와 활력이 넘치는 강연으로 해외 컨퍼런스를 빛내고 청중을 사로잡았던 교수님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한국 과학도들에게 뿌듯함을 선사해주는 순간이었어요.
    회갑기념 논문집 봉저식에서 제자들과 함꼐한 심상철 박사 내외 사진

새로운 과학 분야를 개척하고 다져서 후학들에게 물려주는 일을 평생 이어온 심 박사는 2002년 어느 따뜻한 봄날, 봄꽃이 만발한 때 그가 태어나고 자란 전라남도 곡성 죽곡면의 시골 토담집이 있는 마을에서 영면했다.

심 박사는 끈질긴 노력으로 밤새워가며 실험을 진행하고 학문적 호기심을 유지하기 위해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진정한 과학자였다.     
    시대를 이끌고 미래를 위한 든든한 발판을 마련해 후대에 전달한 열정의 과학자 심상철. 
    정부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의 명예를 헌정했다. 
    그가 과학발전을 위해 헌신한 삶과 그 과정에서 이뤘던 모든 업적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 과학도들에게 소중히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