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스토리 뉴스

스토리 뉴스

국민에게 친숙한 대한민국 대표 과학저술가

저술, 강연, 방송 출연 등을 통해 과학대중화에 앞장 선 국민과학자 김정흠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37 저술, 강연, 방송 출연 등을 통해 과학대중화에 앞장 선 국민과학자 김정흠 국민에게 친숙한 대한민국 대표 과학저술가

학력: 1947~1951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이학사 물리학, 1951~1953 서울대학교 대학원 이학석사 물리학, 1957~1961 미국 로체스터대학 이학박사 물리학 /    
    경력: 1953~1992 고려대학교 교수, 1982~1988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1983~1986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장, 1985~1987 한국물리학회 회장, 1989~2003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 회장 /    
    포상:1972 대한민국과학기술상 국무총리상, 1983 국민훈장 동백장, 1985 대한민국과학기술상대통령상, 2002 대한민국과학기술훈장 혁신장

김정흠 박사 광고 사진 / “컴퓨터는 어릴 때부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컴퓨터 교육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1987년 당시 처음으로 국내에서 시판됐던 컴퓨터 광고의 주인공은 한 과학자였다. TV 출연 및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과학문화 전파에 앞장섰던 김정흠 박사는 물리학 연구자로서 뿐만 아니라 저술가이자 강연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통해 과학연구 진흥과 과학문화 확산에 이바지한 과학 대중화의 선도자이다.     
    과학을 대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방법을 끊임없이 골몰했던 과학자, 김정흠.
    그는 일찍이 한국에 과학문화를 뿌리내리게 한 선구적인 과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김정흠 박사는 1927년 4월 평안북도 용천에서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의 암울하고 불행했던 시기, 초등학교 시절부터 불령선인 不逞鮮人의 자식으로 분류돼 차별받았던 그는 언제나 감시받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불시 검문도 잦았다. 가까운 친척들조차 김 박사와 그의 가족을 꺼릴 정도였다.     
    외톨이었던 그의 유일한 낙이자 힘은 바로 독서였다. 
    김 박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양지바른 곳을 찾아 혼자서 책을 읽는 일 뿐이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그는 1951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1953년 같은 대학원에서 이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김 박사는 고려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에 전임조교로 발령받아 학과의 기틀을 닦았다.    
    학문을 향한 갈망은 그를 더 넓은 세계로 인도했다. 
    김 박사는 고려대 교수로 재직 중인 1957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으며, 4년만에 원자핵 이론 연구 Theoretical study of odd-odd nuclei로 로체스터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 한국전쟁 중 대구에 임시로 세워진 고려대학교 문리과대학 사진 - 출처:인촌기념회

귀국 후 그는 고려대 교수로 활동하며 이론물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특히 미국의 앞선 물리교육을 지켜봐 왔던 그는 대학원생들에게 전과는 다른, 새로운 기법인 Physical Science Study Committee 이하 PSSC 물리실험 등 다양한 방식의 미국식 물리교육 방법을 도입하여 새로운 학풍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는 늘 새로운 것에 목말라 했던 천생 학자였다. 
    1970년에는 고려대 이학부장으로 취임하며 미국식 선진기법에 의한 종합적인 대학 발전방안 등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 제안에는 현재 실시하고 있는 신임교수 채용방법, 교육 및 연구업적을 바탕으로 평가하는 교수 호봉승급 및 직급승진, 그리고 정년보장 제도 등이 광범위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그의 제안은 상당히 파격적인 도전이었다. 
    안타깝게도 그의 제안은 도입되지 않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교육 문화를 바꾸는 데 앞장섰다.

무엇보다 김 박사는 국민들이 과학의 중요성을 깨닫도록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급격한 경제 발전과 사회 변화를 겪고 있던 1960-70년대의 한국사회에서는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도 현저히 높아졌지만, 선진국에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던 첨단과학기술의 내용을 쉽고 흥미있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전문가가 부족했기에 이에 대한 대중의 갈증도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사명감을 가지고 왕성한 저술 및 강연 활동을 벌여 나갔다. 
    전국 초등학교 어머니회, 중고등학교 과학의 날 행사, 각 도 과학관의 과학의 날 행사, 대학교 축제에 초청되어 첨단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상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그가 강연을 진행한 횟수만 해도 연 평균 100회, 최대 연간 180회에 달했다.

그의 강연에 감동해 거액의 기부금을 쾌척한 사람도 있었다. 
    심광숙 고려대 명예교수는 회상록을 통해 “김정흠 교수의 강연에 감동해 1990년 고려대 물리학과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써달라고 8억 원을 쾌척한 사람도 있었다. 전 국민은행장 서정국이었다. 두 선생님 덕분에 수많은 물리학도들에게 지금까지도 장학금을 지원해 오고 있다. 이들 장학생 중에는 이미 물리학 분야의 글로벌 리더가 되어 국내외 대학 및 유수 연구소 그리고 첨단산업체 등에서 크게 활약하고 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깊이 있는 물리학 지식을 바탕으로 무수히 많은 저술 활동에 임하기도 했다. 
    저술 활동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 1980년대에만 그가 쓴 원고량이 연 평균 200자 원고지 4,000~6,000매, 많은 해에는 8,300매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박사가 저술한 저서만 해도 미래의 세계, 기술의 발달, 자연과학개론, 현대물리, 과학여행, 과학의 미래, 첨단과학시대 등 무려 40여 권에 달한다.

1977년에는 한국과학저술인협회를 창설하여 과학대중화를 위한 각종 심포지움, 세미나, 대중강연회 등을 꾸준히 개최했다. 이뿐만 아니라 일부 사비를 들여 4개 부문에 걸친 한국과학저술인협회상 제도를 만들어 과학저술인들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지적재산권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그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를 설립, 정보화 사회에 대비할 기반을 다지는 데 힘썼다.

그는 물리학자이자 미래학자이기도 했다. 
    당시 김 박사는 미래의 발전된 생활상을 흥미롭게 풀어내 대중의 관심을 받았는데, 1980년부터 1982년까지 한 일간지에 연재한 서기 2000년 미리 가본 미래의 세계라는 칼럼에서는 과학기술 발전을 꿰뚫어 본 그의 식견과 통찰력을 알 수 있다. 그가 예상한 상당수 기술이 이미 현재에 실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뉴스데스크에 출연한 김정음 박사 사진 / 과학 대중화를 위한 지속적인 활동 결과 그는 대중에게 과학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졌고, 이는 방송 출연으로 이어졌다.
    그는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약 20년간 KBS 과학프로그램에 출연해 과학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설명했다.     
    한국의 대표 원로 물리학자였지만 어린 학생들과의 만남도 꺼리지 않았다. 
    14년 가까이, EBS 라디오 프로그램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 5분 방송, 매주 4회 정도씩 에 출연하며 초등학생들에게 직접 질문을 받고 답을 해주는 코너를 맡기도 했다.

김 박사의 과학 대중화를 위한 노력은 강연과 저술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과학문화 진흥과 확산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는 데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다. 
    일례로, 김 박사는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심의위원회 위원으로서 초중고 교과과정에 컴퓨터를 포함시킬 것을 주장했고, 이 같은 제안은 오늘날 한국의 정보통신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과학기술 계몽활동에 한 평생을 바친 김 박사의 꿈은 우리나라 과학 꿈나무들이 자라 대한민국을 선진 과학기술 강국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퇴직 후에도 김 박사는 전국을 돌며 강연을 다녔고, 대학원생들을 위한 물리교육에도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과학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했다.

앞으로 사회에 나가 활동하게 되면 매달 수입의 10분의 1은 책을 구입하는 일에 사용하라.
    김정흠 박사가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나설 때마다 항상 당부하던 말이다.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고 늘 강조했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조금의 낭비도 없이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을 주문했던 이 시대의 참 과학 스승이었다.     
    과학 대중화를 위한 그의 헌신에 정부는 과학기술유공자라는 이름표를 그에게 헌정했다. 
    시대를 풍미하며 과학문화를 전파한 그는 우리 마음 속 영원한 국민과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