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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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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인정한 심장 약리학 권위자

한국 약리학 및 기초의학 인프라 구축에 기여 /
우리말 의학용어 보급과 한국 의학의 체계 구축 이우주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49 세계가 인정한 심장 약리학 권위자 이우주
    - 한국 약리학 및 기초의학 인프라 구축에 기여
     우리말 의학용어 보급과 한국 의학의 체계 구축

학력 - 
     1941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
     1955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박사 /
     1958 미국 위스콘신대학 대학원 이학박사 /        
     경력-
     1952~1983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 교수 /
     1960~1964 연세대학교 대학원장 /
     1969~1970 대한약리학회 회장 /
     1975~1980 연세대학교 총장 /
     1981~2007 대한민국학술원 정회원 /        
     포상-
     1961 삼일문화상 /
     1970 국민훈장 동백장 /
     1979 국민훈장 무궁화장 /
     1983 대한민국학술원 학술상

무서울 땐 무서웠지만 아버지 같았어요. 외국 연수 갔다 한국에 들어온 제자들에게 자동차를 그냥 사주셨어요. 호랑이 같다가도 아랫사람들을 따뜻하게 잘 챙기시던 분이었어요.(김동구 연세대학교 교수)

     이우주 교수는 발자국 소리만으로도 제자들을 긴장시켰던 호랑이 선생님이었다. 
     학문을 대하는 데 있어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았던 이 교수의 냉철한 가르침 덕분에 제자들은 학문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항상 되뇌며 진리를 탐구할 수 있었다. 
     호랑이 선생님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가족처럼 제자들을 아껴주었던 그의 마음은 여전히 제자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약리학의 지평을 새로이 연 이우주 교수. 
     그는 학문의 방향을 제시하고 후학들을 양성한 위대한 의학자이자 우리나라 대학의 역할과 학문적 위치를 높인 교육 행정가였다.

세브란스 의전시절 이우주교수(1938)사진 / 이우주 교수는 1918년 충남 공주군 유구면에서 태어났다. 
     명문가 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가풍을 통해 학문을 향한 진중한 자세를 배우며 자라났다. 
     
     1936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웃을 돕기 위해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연세대 의대 전신)에 진학해 1941년 3월 졸업한다. 
     졸업 후 모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며 우리나라 기초의학의 열악한 현실과 마주했던 그는 국내 기초의학 발전이라는 큰 뜻을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50년 한국전쟁 중 미국 국무성 인사교환 프로그램 장학생으로 선발된 그는 미국 위스콘신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장학생 선발 영어시험을 치르기 위해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외웠다는 그의 일화는 현재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의 노력과 열정은 학문을 향한 깊은 관심과 애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 위스콘신 대학 시절 친구들와 왼쪽부터 리프손 박사, 스타윗치 박사, 이우주 사진

위스콘신대학에서 약리학 연구를 진행한 그는 미국과 한국의 수준 차이를 절감한다.
     열악한 상황이었던 한국과 달리 미국의 약리학 연구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미국 학자들의 노력과 열정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년 반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미국에서 겪은 학문적 쇼크는 그를 다시 미국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귀국 후 1955년 서울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 교수는 다시 도미하여 위스콘신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한다. 
     대학원 과정을 다시 밟으며 학문적 바탕을 공고히 하려는 게 이유였다.

이우주 카드뉴스 이미지7(해상도 72).jpg 이미지입니다.

이 교수가 당시 발표한 논문은 1959년 세계적 과학저널인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될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Role of Myocardial Catecholamines in Cardiac Contractility라는 제목의 이 논문은 평소 기본적인 교감신경 활성도가 심혈관계 생리기능 및 질병발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증명한 최초의 연구이자 고혈압 및 울혈성 심부전증의 병태생리 기전 및 치료 원칙의 수립에 크게 기여한 연구로 평가받았다.

그의 발표 이후 Catecholamine(카테콜라민)의 역할에 대한 연구가 심장에서 자율신경계 전반으로 확장됐다. 이 교수는 이후에도 연구를 통해 교감신경의 기능을 전달하는 카테콜라민을 체크함으로써 심장의 이상 여부를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혔고, 이는 세계 약리학 교과서에 인용되기도 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 역시 그의 업적을 인정해 5년간 총 4만 달러의 연구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이 160달러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의 연구비 수주는 정부가 주목할 정도로 획기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국내 약리학 및 의학 연구수준을 높이기 위해 힘썼다. 
     이 교수는 세계적인 의학교육에 발맞춰 연세대 의과대학의 교육 목표를 설정하고, 세포분자생물학과 행동과학 과목 신설과 통합강의 도입 등을 통해 교과과정의 쇄신을 도모했다. 이 같은 변화는 국내 많은 의과대학의 교과과정 개편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현대 한국사에서 격동기였던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연세대학교 제7대 및 제8대 총장을 역임하면서 연세대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이 교수는 강의에도 무척 열심이었다. 그의 강의는 명강의로도 유명했는데, 경험을 통해 체득한 지식을 전달했다는 점에서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했다. 
     그가 늘 강조했던 것은 학문의 본질과 학문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열악한 형편에도 실험은 어떻게 해서든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무렵 선생님께서 실험기구가 없어서 실험을 못한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은 그가 원하는 모든 설비를 다 갖추어 주어도 또 다른 핑계나 이유를 내세워 결국 아무 일도 못하기 마련이다라고 하셨었죠. 학자들이 마음에 새겨 넣어야 할 말씀을 해주셨어요.
     (김경환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그는 연구나 학문의 문제에서 한 치의 양보나 타협도 허용치 않았던 호랑이 선생님이었다. 이 교수에게 ‘적당하게’라는 말은 절대 통용될 수 없었다. 
     일례로 실험실에서 책을 보는 연구원은 꾸지람의 대상이었다. 책은 밤에 자는 시간을 아껴 읽어야 하고, 실험실에서는 실험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그가 실험실로 오는 소리가 들리면 연구원들은 실험에 몰두하는 시늉이라도 냈다. 
     이 교수는 제자들이 학문을 향해 황소처럼 돌진하기를 바랐다. 학자로서 긍지와 명예를 좇으며, 항상 노력하고 공부하는 자세를 강조했다.

그의 주요 업적 중 다른 하나는 영한의학사전(1960)과 약리학 강의(1984), 의학대사전(1990)을 편찬한 것이다. 
     평소 의학 용어와 우리말 교과서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던 이 교수는 우리말 의학용어의 상당 부분이 일본식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문제 삼았고, 퇴임 후 10년에 걸쳐 의학대사전을 편찬하는 집념을 발휘했다. 이 사전은 한국 의학의 체계를 세우는 데 공헌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화에도 큰 영향을 끼치며 현재까지도 전무후무한 의학서적으로 분류되고 있다. 
     또한, 약리학 강의 역시 의학도들의 필독서이자 대한약리학회의 표준교과서로 채택되어 대학 교육에 이용되고 있다.

대한민국 학술원상 메달을 목에 걸고 있는 이우주 교수(1983)이 교수는 한국 약리학의 세계화를 위해 힘쓴 선각자였다. 
     1947년, 30세도 되지 않았을 무렵 오진섭, 박주병, 주인호 등 7명의 약리학계 교수들과 함께 조선약리학회(대한약리학회 전신)를 발족시켰으며, 1969년 학회장을 역임하며 우리나라 약리학의 세계화에 기여했다.         
     그는 학문적 업적과 사회적 공헌으로 국민훈장 동백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대한민국 학술원 학술상, 동아의료문화 저작상 등 많은 훈장과 표창을 받았으며 교육에 관한 공로로 명예법학박사를 받았다.

연세대 의료원은 이러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18년 흉상 제막식을 열었다. 
     이우주 교수 출생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흉상 제막식은 후학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제자들이 자발적으로 제작비를 모아 만든 그의 흉상은 연세대와 의료원을 내다볼 수 있는 곳에 세워졌다. 작고한 지 11년 만에 그는 모교의 품으로 돌아오게 됐다. 
     연세대 의료원에 세원진 이우주 교수의 흉상(2018)

후학 입장에서 아버지 성취를 볼 때 넘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었습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참 열심히 하는데 도저히 뛰어넘을 가망성이 없다는 것을 절로 느껴요.
     (이병인 인제대 해운대백병원 뇌전증센터장)        
     세계가 인정한 심장 약리학 분야의 권위자 이우주 교수.
     나라를 위한 큰 뜻으로 학문을 향해 내달렸던 그는 한국 기초의학의 초석을 다진 선구자였다. 
     그가 쌓은 학문적 자산은 비옥한 토양이 되어 후학들을 든든히 받쳐주고 있다. 
     그곳에 깊게 뿌리 내릴 후학들의 빛나는 성과를 그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