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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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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포항제철의 신화를 이끈 철(鐵) 박사

한국 철강기술의 토대 마련과 철강산업의 고속성장 견인 / 포항제철 고로 1호 설계와 건설을 주도한 재일동포 공학자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50 한국 철강기술의 토대 마련과 철강산업의 고속성장 견인 포항제철 고로 1호 설계와 건설을 주도한 재일동포 공학자
김철우|세계 최고 포항제철의 신화를 이끈 철(鐵) 박사 
학력 1953 | 도쿄공업대학 공학사(금속공학) 1956 | 도쿄대학 대학원 공학석사(금속제련) 1963 | 도교대학 대학원 공학박사 경력 1956~1973 | 도쿄대학 생산기술연구소 문부기관 연구직 1급 겸 연구교수 1971~1980 |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상무이사(건설본부장) 1980~1989 |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부사장 1995~1999 | 영남대 산업기술대학원, 충남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포상 1957 | 일본 아사히학술상(자연과학부문) 1961 | 일본철강협회 최우수논문상 1965 | 일본금속학회 연구논문상 1987, 1999 | 대한금속학회 금속기술상, 최고금속학회상 김철우 박사는 1926년 일본 시즈오카의 가난한 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재일교포 1세였던 그의 부모는 열심히 일해도 벗어나지 못했던 가난의 굴레에서도 아들의 교육만큼은 소홀히 여기지 않았고, 그 역시 희망을 놓지 않았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공부에 매진했던 김 박사는 도쿄공업대학과 도쿄대학 대학원을 졸업하며 마침내 금속공학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가 철강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1956년 도쿄대학 생산기술연구소 문부기관(文部技官) 연구직 겸 연구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였다. 귀화하지 않은 재일조선인 신분으로 도쿄대학 연구교수가 된 그는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연구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는 그가 도쿄대학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무렵, 한 명의 거물급 재계 인사가 그를 찾아왔다. 당시 일본에서 제과업과 유통업으로 성공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던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이었다. 신 회장은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김 박사를 찾아갔다. 신 회장의 이야기를 들은 김 박사는 그 자리에서 조국을 위해 힘을 보탤 것을 약속한다.  그는 1968년부터 종합제철소에 필요한 공정 구성과 필요한 기술 도입 등 전 분야에 걸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1970년부터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중공업연구실장을 맡아 포항제철의 밑그림을 그렸다. 포항제철 용광로 1호기를 사실상 설계한 것도 김 박사였다. 1년 후인 1971년, 도쿄대학 교수직을 내려놓고 귀국한 그는 포항제철 건설본부장(상무이사)으로 부임하며 조국의 경제 발전과 산업화에 완전히 몸담기로 결심한다. 포항제철의 사령관은 박태준 회장이었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 포항제철을 건립을 주도했던 건 김 박사였다.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에도 채 미치지 못하던 시절, 가난한 나라가 중공업의 핵심인 제철소를 짓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던 때였다. 건설자금은 물론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미흡한 상황이었지만, 김 박사를 비롯한 당시 역군들은 실패하면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라는 사명감을 안고 포항제철과 용광로 건설에 투혼을 발휘했다. 그들의 헌신으로 모래바람이 파도처럼 밀려들던 황무지 위에 대한민국 철의 역사가 비로소 세워질 수 있었다. 1973년 6월 9일, 마침내 포항제철 제1고로(1호기 용광로)에서 검붉은 쇳물이 흘러내렸다. 착공한 지 3년, 한국에 종합제철소를 세워야 한다는 구상이 나온 지 8년 만의 일이었다. 이어 한 달 뒤인 7월 3일, 연간 강철 생산량 103만 톤의 포항제철 1기가 준공됐다. 그러나 그는 이 순간을 지켜보지 못했다. 포항제철 준공을 한 달 가량 앞두고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된 탓이었다. 죄목은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 1970년 북송된 형제들을 만나게 해준다는 공작원의 말을 믿고 북을 방문했던 게 이유였다. 김 박사는 결국 간첩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6년 6개월을 복역했다. 
이후 그는 2012년에서야 재심을 통해 무죄선고를 받고 [간첩]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남북 분단의 비극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러나 김 박사에겐 조국의 발전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다. 1979년 8월 15일 특사로 가석방돼 풀려난 김 박사는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 사면을 받고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다. 그가 한국 정부의 권유로 영구 귀국할 때 지인들은 만류했다. 귀국과 동시에 포항제철에 복귀한 그는 기술고문, 기술담당 부사장을 역임하면서 한국 철강산업의 세계적 기술발전을 이끈 연구개발프로젝트를 주도했다. 파이넥스 공법의 기반이 되는 용융환원제철법을 비롯하여, 스트립캐스팅(Strip Casting) 기술, 400계 스테인리스강(STS)기술, 초대형고로 설계기술 등의 개발에 착수하여 세계 철강기술의 선두주자로 나섰다. 탄소 소재기술의 중요성을 일찍 파악했던 그는 인조흑연 제조기술 확보에 주력하기도 했다. 1989년부터 코크스, 탄소섬유, 탄소섬유 강화플라스틱 복합재료 등을 포항제철의 신성장 사업화 대상으로 확장시켜, 현재 2차 전지 음극제 소재 개발에 기초를 제공했다. 기술력을 강화하기 위해 연구개발을 멈추지 않았던 그는 [산업의 쌀] 철강으로 고국을 선진국으로 만드는 데 앞장서며 ‘기술포철’의 주역으로 우뚝 올라섰다. 김 박사는 산·학·연 연구개발체제의 기반을 구축하며 철강 고유기술 확보에도 앞장섰다. 그는 포항제철 기술연구소장(겸임 부사장) 재임 당시 박태준 회장과 포항공과대학(현 포스텍) 건립과 함께 ‘산학연 체제 구축’을 구상하며, RIST(구 산업과학기술연구소, 현 포항산업과학연구원)를 설립했다. 그는 2년간 RIST 초대 소장을 역임하며 포항제철-포항공대-RIST로 이어진 산학연 연구개발체제의 기반을 구축했고, 그 결과 RIST는 세계 최고수준의 철강연구소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퇴임 후에는 대덕연구개발특구지원본부의 고문과 신아시아산학관협력기구 이사장을 맡아 중소기업간 기술교류에 힘썼다. 자신의 퇴직금 전액을 출연하여 만든 (사)한국테크노마트를 통해 일본의 우수 중소기업 기술이전과 산업인재 교류를 위해 노력했다. 2009년에는 (사)신아시아산학관협력기구를 창립하여 초대 이사장을 맡으며 한중일 3국의 무역, 투자, 기술협력을 촉진하여 동북아 지역의 경제공동체 구축에 헌신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으로부터 제1회 동북아국제협력상을 받았다. 이렇게 김 박사는 최빈국이었던 한국을 철강기술의 연구개발을 통해 최고의 철강국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고국인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한국의 철강기술 발전을 이끌었고, RIST의 산학연 협력체계 구축과 우수한 철강 인재 양성에도 힘썼다. 그의 헌신 덕분에 오늘날 한국의 철강산업은 우수한 기술적, 인적 토대 위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