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스토리 뉴스

스토리 뉴스

한국 반도체산업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전자공학자

국내 반도체 및 디지털 기기 기술개발에 기여 / 문제해결형 연구풍토 조성과 엔지니어 육성으로 산학협력 증진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54 한국 반도체산업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전자공학자 김충기 | 국내 반도체 및 디지털 기기 기술개발에 기여 문제해결형 연구풍토 조성과 엔지니어 육성으로 산학협력 증진 학력 | 1965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공학과 1967 미국 컬럼비아대학 전기공학과 석사 1970 미국 컬럼비아대학 전기공학과 박사 / 경력 | 1970~1975 Fairchild R&D Lab 1975~2008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과 교수 1995~1997 KAIST 부원장 / 포상 | 1993 호암상 1997 국민훈장 모란장 [두고 보십시오. 반도체 분야에서 일본을 집어삼켜 버릴 겁니다.](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 [네가 이 세상에서 목구멍이 제일 큰 놈이로구나.](김충기 교수) 잘나가던 IBM을 그만두고 국내 반도체 산업을 일으키겠다고 호언장담한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 그런 그를 김충기 교수는 호탕한 웃음으로 반겼다. 젊은 공학자의 치기어린 허언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었지만, 김 교수는 그러지 않았다. 첨단 반도체 연구를 국내에 정착시킨 한국 반도체의 대부, 김충기 교수. 그는 반도체 산업기술 개발을 이끈 1, 2세대 주역들을 키워낸 시대의 스승이었다. 김 교수는 194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성방직의 섬유 엔지니어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문제 해결을 중시하는 집안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 잠재돼 있던 그의 엔지니어 정신이 눈뜬 건 첫 직장에서였다.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 전자공학과에서 반도체 이론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마냥 학구적인 모범생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후 들어간 첫 직장 페어차일드에서의 연구경험은 어린 시절 익숙했던 엔지니어 정신을 일깨우는 촉매가 됐다. 1970년대 페어차일드는 미국 최고의 반도체 기업 중 한 곳이었다. 그는 입사하자마자 최첨단 기술이었던 전하결합소자(CCD) 연구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는 반도체 핵심소자인 CCD가 처음 개발된 직후였다. 빛을 전기신호로 바꾸는 CCD는 빛 정보를 화면에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구현했다. / 그는 1973년에 세계 최초로 500 화소 CCD 선형 영상감지소자를 개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기술은 상품화됐고, 그는 동료들에게 ‘CCD 교수’로 불릴 정도로 전문성을 인정받게 됐다. 연구에서의 탁월성을 인정받은 그의 다음 선택지는 한국이었다. 고국의 반도체산업에 기여하고 싶은 소망을 늘 품고 있었던 그는 1975년 잘 나가던 페어차일드에서의 연구생활을 뒤로 하고 신생 한국과학원의 전기 및 전자공학부 교수로 자리를 옮긴다. / 당시 한국에는 반도체산업이라는 개념이 전무했다. 그러나 그는 언젠가 한국의 대기업들이 반도체산업에 뛰어들 것이라 확신했다. 그의 이러한 결단은 한국 반도체산업 역사에서 중대한 기점으로 작용했다. 사실 반도체산업의 중요성에도 이렇다 할 전문가가 없던 국내 상황은 암담했다. 1970년대 초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발광 다이오드 제작, 실리콘 적층 연구, 집적회로 제작 실험 등의 연구가 수행되고 있었지만, 반도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나 교육은 이뤄지지 않았다. 큰 그림을 그리고, 앞에서 이끌어 나갈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 마침 첨단연구 경력을 가지고 귀국한 김 교수는 연구자로서, 또 교육자로서 해야 할 일들을 정확한 타이밍에 해내며 국내 반도체산업의 개척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는 반도체 기술 연구와 교육이 무엇보다 시급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한국과학원에 반도체 집적회로 제작을 위한 설비 구축에 나선 그는 여기에만 3년이란 시간을 쏟아 붓는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 [반도체를 산업으로 키워야 내가 교수로서 할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력을 키웠죠. 학생들에게 실무를 가르치고, 교과서에 나오는 것과 실무에서 다른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쳤습니다. 학생들이 졸업할 무렵 국내 대기업들이 반도체에 투자를 시작하더군요.] 그 결과 그의 연구실은 국내 반도체 기술 연구의 중심에 서게 됐다. 그의 연구실에서 이론과 실습이 균형을 이룬 첨단 반도체 연구와 교육이 실행됐고,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우수한 학생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 페어차일드에서 자유롭게 소통하는 기술을 경험한 그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늘 인기 만점이었다. 특히 기술의 실제 문제를 염두에 둔 그의 연구 태도는 학생들에게 늘 귀감이 됐다. 1990년대에 그의 연구실에서는 연구주제를 다각화하고 특히 미래를 준비하는 새로운 문제에 도전했다. 산업현장의 당면과제에 대한 연구는 기업 연구소에서 충분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당시 정부와 기업의 반도체 연구 지원을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대학 조직이었던 그의 연구실에서는 교수의 전문성과 학생들의 열의가 더해져 우수한 연구성과가 창출되기 시작했다. 그의 제자들은 졸업 후 국내 주요 반도체기업에 진출하여 1980년대에 본격 시작된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빠른 속도로 본궤도에 오르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문제해결 능력을 갖춘 그의 제자들은 반도체산업 초기부터 기업에서 실질적인 기술개발의 주역이 되었다. 1975년부터 2010년까지 그는 72명의 석사와 38명의 박사를 지도했는데, 이들은 특히 한국의 반도체산업이 성장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신화를 일으킨 권오현 삼성전자 겸 종합기술원 전 회장과 국내 반도체 분야 기술 혁신에 혁혁한 공을 세운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 임형규 삼성종합기술원 전 사장, 오춘식 하이닉스 전 부사장, 경종민 KAIST 교수 등이 그의 애제자다. /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은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KAIST 김충기 교수와 故 이병철 삼성회장은 오늘의 진대제가 있게 한 참 스승이십니다.] KAIST는 2007년 그를 [특훈교수(Distinguished Professor)]로 임명하기도 했다. 특훈교수는 서남표 전 KAIST 총장이 대학 비전을 밝히면서 약속한 제도 중 하나다. [최고 교수 가운데서도 최고]라는 명예직으로, 세계적 수준의 연구업적과 교육성과를 이룬 교수들을 대상으로 임명된다. [나가라고 하는 것보다는 기분이 좋네요. 아무래도 일을 더 하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웃음)] 어떤 자리에서든 ‘일기예보 인생론’을 강조한다는 김 교수. 그는 미래가 보이는 데도 준비하지 않는 인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는 데도 우산을 준비하지 않고 집을 나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일 실험이 있다는 데도 아무 준비도 없이 학교에 오는 학생들이 있듯이 말입니다. 미래가 보이는 데도 오늘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의 인생은 실패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2000년대 한국 경제에서 메모리 반도체와 반도체 소자를 핵심부품으로 쓰는 디지털 기기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반도체산업 초기에 꼭 필요한 연구를 수행하고 전문인력을 키운 그의 역할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다. 이것이 그를 한국 반도체의 대부라고 부르는 이유다. / 정부는 그의 업적을 인정해 1997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고, 2019년 과학기술유공자로 지정하며 그의 헌신에 경의를 표했다. 국가의 과학자로서, 또 KAIST 교수로서 그는 연구개발과 인력양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국가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국가와 후학의 미래를 걱정했고, 자신의 역할을 끊임없이 고민하며 배움의 길로 나아갔다. / 그의 손에서 탄생한 수많은 연구성과들은 반도체 강국 대한민국을 성장시키는 마중물이 됐고, 그가 길러낸 수많은 제자들은 대한민국을 이끄는 리더가 됐다. 한국 반도체 대부 김충기 교수. 그는 오늘날 대한민국을 이끄는 과학자들의 표상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