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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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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우주·해양개발계획 이끈 과학기술 행정가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 건설과 스마트원자로 개발 추진 / 과학기술계 지원과 과학기술인헌장 제정에 기여

대한민국과학기술유공자 /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58 / 한국 우주·해양개발계획 이끈 과학기술 행정가 김시중 -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 건설과 스마트원자로 개발 추진 / 과학기술계 지원과 과학기술인헌장 제정에 기여 학력-1955 서울대학교 화학과 졸업, 1957 서울대학교 대학원 이학석사(화학), 1967 고려대학교 대학원 이학박사(화학) / 경력-1960~1997 고려대학교 교수, 학장, 부총장, 1993~1994 제14대 과학기술처 장관, 2002~2005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 포상-1980 국민훈장 석류장, 1992 대한민국과학기술상 과학상, 1995 청조근정훈장, 2005 한국과학기술한림원상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과학기술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패배의식과 열악한 환경에서 과학기술인이 살고 있다면 대한민국의 미래인 2세, 3세 아이들에게 과학 발전을 약속할 수도 맡길 수도 없습니다. 과학기술인의 자부심이 살아난다면 내 자식에게도 이공계를 추천할 수 있을 겁니다.' 병상에서도 우리나라 과학기술에 대한 걱정뿐이었던 김시중 전 과학기술처 장관은 미래 비전을 가진 탁월한 행정가이자 과학기술 정책의 기반을 닦은 전략가였다. 늘 연구현장에서 국가의 미래를 생각했던 김시중 전 장관. 그가 설계한 장기적인 연구계획은 지금도 한국의 과학기술의 나침반이 되고 있다. '시커먼 원유에서 깨끗한 석유는 물론이고 아스팔트와 일상용품인 나일론까지 나오는데, 얼마나 신기했던지…. 게다가 선생님이 석유화학이 나라살림을 풍요롭게 할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그 때 석유화학의 선구자가 되리라 마음먹었지요.' 앳된 소년의 꿈은 선생님의 말 한 마디에서 시작됐다. '석유화학공업이 나라살림을 풍요롭게 할 것'이라는 중학교 화학 선생님의 말은 그가 큰 뜻을 품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나 공부를 너무 잘한 게 걸림돌이 됐다. 그는 석유화학 전문가가 되기 위해 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에 들어가려 했지만, 당시 중학교(현재의 고등학교) 1등 졸업생은 모두 서울대 문리과대학으로 진학해야 한다는 학교의 방침에 따라 화학과로 진로를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1951년 대학에 들어갔는데, 전란에도 공부 열의는 뜨거웠다. 천막 교실의 흙바닥에 앉아 교수들의 강의에 귀를 기울였다. 참고도서도 없던 시절,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산더미 같은 숙제를 내주며 스스로 실력을 향상시켜 갈 수 있도록 지도했다. '실험실도 없었는데, 교수님이 부산 범일동에 있었던 대선발효공업주식회사의 실험실을 빌려서 직원들의 퇴근한 밤 시간을 이용해 학생들이 분석화학 실험을 할 수 있도록 해주셨어요. 교수님의 정성에 감복해 학생들은 실험하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였지요.' 그는 서울대 대학원에 다니면서 동시에 고려대 화학과 조교로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조교 월급으로 다행히 하숙비는 낼 수 있었지만, 생활비까지 감당하기는 힘들었다. 그는 조교 외에 시간제 과외교사로 돈을 벌어 생활비로 사용했다. 잠잘 시간까지 아껴가며 생활한 덕분에 강의와 실험에 쫓기면서도 공부하고,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3년 후 전임으로 채용하겠다고 약속했던 고려대는 5년 후인 1960년에야 그를 전임강사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37년간 이어진 고려대에서의 그의 교직 생활이 시작됐다. 그는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강사는 아니었다. 시험 성적을 벽에 붙여 공개했고, 시험 답안지를 줄 때에는 직접 학생을 호명해 대면한 뒤 점수를 불러주며 돌려줬다. 학생들이 '심한, 그리고 인격모독인 교육방법'이라고 항의하면서 강의실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며 학생 1명이라도 강의실에 있으면 그 밖의 학생은 모두 결석처리하고 강의를 진행했다. 그는 계획대로 교육을 하는 것이 학생들을 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열악한 환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건 인내와 협조, 그리고 학문에 대한 열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천성적으로 부지런하고 열정이 넘쳐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임했던 그는 화학계를 비롯한 과학기술계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궂은일이라도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 1960년부터 고려대 화학과 교수로 무기화학 분야의 연구와 교육에 매진했고, 고려대학교 부총장, 한국과학교육단체총연합회 회장, 과총 회장대행, 대한화학회 회장을 거치며 국가의 과학정책과 인연을 맺었다. 이러한 그의 이력은 문민정부의 초대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봉직하던 시기(1993.2~1994.12)에 빛을 발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 평가되는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 건설 역시 그의 소신과 뚝심이 없었다면 해결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1993년 4월 한국해양연구소 연구원들이 그를 찾아왔고, 해류와 어류 연구를 위해 이어도에 무인관측소를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한 그는 '허황된 영토 걱정은 접어두고 과학기술 행정이나 잘 챙기라'는 경제부총리의 핀잔에도 개의치 않고, 종합해양과학기지 건설을 위해 힘썼다. 그의 노력으로 2003년에 완공된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는 과학 연구를 수행하는 것을 넘어 오늘날 우리가 이어도의 해양 관할권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확실한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1990년대 초중반 북핵 문제로 국내외가 민감한 상황에서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강조하면서, 이를 위해선 핵폐기물 재처리 연구가 필요하다고 누차 강조했다. 원전 폐기물 처분장의 안전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장관실 앞에 중·저준위 폐기물이 담긴 드럼통을 비치했을 정도였다. '한국은 핵무장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경제·산업 목적으로 최소한의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권한을 요구하는 것이다. 재처리를 못함으로써 생기는 핵폐기물 문제는 몇 년 안에 재앙이 될 수도 있다.' 그가 추진했던 또 다른 장기 연구계획은 '스마트원자로' 개발 사업이다. 그는 1993년 중국을 방문해 대형 원전이 중국에서는 비경제적이라는 사실을 관련자에게서 듣고, 건설비용이 저렴하고 발전용량이 적은 중소형 원자로를 개발한다면 미래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 장관 재직 시절 소련이 붕괴하자 그는 신재인 당시 원자력연구소장에게 소련의 핵잠수함용 원자로 기술 확보를 지시하고 한국형 표준원전 개발의 씨앗을 심기 시작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로 중소형 다목적 스마트원자로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밖에도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인 과학기술 성과엔 그의 계획이 있었다. 우주개발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그는 우리 스스로 발사체를 개발해야만 우주개발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의 이러한 신념은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은 물론, 우리나라 우주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그는 우주발사체용 액체로켓 기술 개발을 위해 민간기업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했고, 연구원과의 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러시아에서 이동식 발사대를 도입한 것도 그의 빠른 행동력 덕분이었다. 이를 토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발사체 나로호(KSLV-Ⅰ)와 한국형발사체(KSLV-Ⅱ) 등 국가 우주개발 계획이 수립되고 실행됐다. 장관 퇴임 후에는 과학기술인의 권익 신장과 과학기술 지원 분위기 조성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과학기술이 국가 발전에 기여하려면 무엇보다 과학기술인들이 윤리적으로 성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총 회장으로서 그가 앞장서 만든 '과학기술인헌장'(2004)은 과학기술자들의 윤리의식을 고취하도록 제정됐다. 과학기술인 헌장 - 1. 우리는 과학지식을 증진시키고 기술혁신을 추구하여 인류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노력한다. 2. 우리는 지속 가능한 과학기술 발전을 통하여 깨끗하고 안전한 자연 환경을 만든다. 3. 우리는 탐구의 자율성을 소중히 여기며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윤리의식을 갖는다. 4.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해 미래세대를 육성하는 데 힘을 기울인다. 5. 우리는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이해를 높이는 데 앞장선다. 6. 우리는 과학기술을 통해 자랑스러운 전통문화의 발전과 민족 화합에 이바지한다. 그는 과학기술계를 위해서라면 정부를 향한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2008년 수면위로 떠오른 과학기술부 해체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 뛰어다녔고, 해체된 이후에도 과학기술 컨트롤타워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등 전면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진정한 국가 발전을 위해선 과학기술이 국정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학기술인들이 실질적으로 국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기반 마련 역시 그의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타협 모르던 대쪽 과학자의 신념에 과학기술계는 변화를 시작했다. '큰 사람은 호화찬란한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 어느 시대든 희망과 자신감을 잃지 않아야 한다.' 김시중 전 과학기술처 장관. 누군가는 그를 '시끄러운 과학자'로, 누군가는 '따뜻하면서도 소신 있는 과학자'로 기억한다. 그러나 모두가 인정하는 건 그가 그 누구보다 한 발 앞서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 방향을 제시했던 미래지향 과학기술 정책가이자 타고난 과학기술계 리더였다는 사실이다. 척박한 토양에서 국가 과학기술 발전에 평생을 바쳤던 김시중 전 장관. 열악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연구를 포기했던 그를 후배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과학기술 정책의 씨앗을 뿌려 거목으로 성장시킨 김시중 전 장관을 자신들의 가슴 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을 큰 별로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