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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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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감염병 치료 및 연구의 기틀을 다지다

급성 감염병 치료 및 퇴치사업에 힘쓰고 예방을 위한 국민 계몽에 헌신
서울의대, 가톨릭의대, 인제의대에서 선진 의학교육 기반을 구축

한국 감염병 치료 및 연구의 기틀을 다지다 전종휘
급성 감염병 치료 및 퇴치사업에 힘쓰고 예방을 위한 국민 계몽에 헌신
서울의대, 가톨릭의대, 인제의대에서 선진 의학교육 기반을 구축학력-1935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1945 경성제국대학 의학박사
경력-1937~1942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수보, 부수,1940~1942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조교수,1946~1964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1955~1956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연수,1964~1977 대한감염학회 회장,1964~1978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부속 성모병원 원장, 대학원장,
1975~1980 대한면역학회 회장,1979~1993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학장,
포상-1966 삼일문화상 자연과학상,1970 국민훈장 동백장,1977 대통령 표창,1999 성곡학술문화상“보건비가 가축위생관리비는 90억 환인데 사람의 것은 60억 환도 못 된다” (전종휘)“어린이가 사망하면 부모들은 시원섭섭한 정도에 그치지만, 기르던 소가 죽었다면 일가친척들이 모여 통곡하는 형편이라는 걸 아십니까?” (공무원)(전종휘, 「사람값」,「동아일보」 1963년 4월 19일)1963년 4월, 당시 보건사회부 보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던 전종휘 교수는 책정된 보건비에 대해 사람값보다 동물값이 더 중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공무원의 말에 분노했다. 그는 “사람값을 낮추도록 하는 도배(徒輩)들이 있으니 이는 바로 돈만 알고 이것으로 무엇이든지 움직일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전종휘 교수는 1913년 함경북도 성진군(현재 김책시)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아버지가 행방불명되면서 어려운 초년기를 보냈던 그는 큰 누이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스승 백인제 교수와 선배 장기려를 만나 특별한 관계를 형성했다. 1935년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감염병 환자 격리병원이었던 경성부립순화병원(京城府立順化病院)에 간 것도 스승인 백인제 교수의 권유 때문이었다. 백 교수는 사욕(私慾)에는 관심이 없지만 사회적 기여에 보람을 느끼는 제자의 성정을 파악하고,세균학의 권위자인 일본 교수 밑에서 공부해 볼 것을 권유했다. 당시 순화병원의 병원장은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역임한 세균학자 시이바 요시야(椎葉芳彌) 였다. 감염병의 도시로 악명이 높았던 경성에서도 사선에서 분투하던 곳이 바로 순화병원이었는데, 시이바 원장은 그곳에서 치료와 동시에 감염병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전 교수는 그의 지도로 우리나라의 각종 감염병에 대한 많은 지식을 습득했다. 그는 이곳에 근무하면서 일본뇌염 및 열대열 말라리아로 입원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4편의 임상 증례보고를 일본 학술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중 열대열 말라리아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었다. 그러나 질병학적 발견을 위한 과정은 말로 다 하지 못할 고난의 연속이었다. 환자들을 치료하는 의사나 간호사들 역시 죽음의 언저리에 있는 건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실제로 그는 순화병원에 재직하면서 발진티푸스에 걸려 1개월 동안 사경을 헤매기도 했으며, 시이바 원장은 이후 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2년간 순화병원에서 근무한 그는 1937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내과로 자리를 옮겼다. 1939년 박사학위 취득을 위해 다시 병리학교실로 자리를 옮긴 그는 부수(副手)로서 연구 생활을 시작했다. 비록 무급이었지만 부검의 책임자로 일하며 병리학을 내실 있게 공부했던 시기였다. 그는 일본 병리학회에서 발표한 “인체 위, 장, 비장, 신장 및 골수의 철 소견”을 주 논문으로 1945년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해방 직후의 서울은 행정의 공백과 국내외에서 밀려든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급작스러운 인구의 대이동은 생태학적 균형을 무너뜨렸고, 이는 기존 및 신종 감염병의 창궐로 이어졌다. 제대로 된 보건 정책도, 인력도, 시설도 부족했던 그때,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새로이 개설된 ‘전염병내과’의 초대 과장으로 부임한 그는 강사 1명, 조수 1명과 함께 감염병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가 최후의 방어선이 된 셈이었다.1946년 치명률 65.1%의 엄청난 참사로 기록되고 있는 콜레라 대유행 시기에도 그는 전면에서 활약했다. 전 교수는 검역작업의 책임자로 활동하며 콜레라의 전파 억제와 환자 치료 등 감염병의 최전선을 책임졌다. 1949년 전국적인 일본뇌염의 유행으로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사망자 가족의 동의를 얻어 부검을 통해 일본뇌염 바이러스를 분리해 내는 데 성공한 그의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에도 일본뇌염을 지속적으로 연구한 그는 ‘뇌염 박사’로 불리며 감염병 전문가로 우뚝 올라서게 됐다.감염병이 유행하는 현장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보건사회부 방역보건위원, 육군 유행성출혈열 연구반 위원, 육해공 3군의 의무(醫務)자문관, 대한민국 방역전문위원 등 다양한 역할을 맡아 임무를 수행했다. 전 교수는 감염병을 학문으로만 연구한 것이 아니라, 방역과 치료는 물론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 결과, 그는 한국 사회가 감염병이 돌 때마다 소환하는 자타공인 감염병 최고 권위자가 될 수 있었다. 휴전 후 서울의대 내과학교실로 자리를 옮겨 근무한 그는 미국 원조로 이루어지는 서울대학교 재건계획에 따라 1955년 9월부터 1년간 미네소타대학교에서 연수를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각종 감염병에 대한 일반 지식과 진단 방법에 대해 공부하는 한편, 미국의 의대 및 병원의 협력 관계가 일본식 제도와 어떻게 다른지를 철저하게 분석했다.전 교수가 특히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은 미국식 토론 방식이었다. 집담회나 컨퍼런스 등을 통해 교육의 효과가 더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고 느낀 그는 귀국 후 서울의대와 가톨릭의대에 적용하며 기존 의학교육 제도를 개선하는 데 앞장섰다.미국에서의 경험은 교수들에게도 제한 없이 적용됐다. 학술모임이나 토론회 개최 등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1958년에는 의과대학의 여러 학과 교수들이 참여한 ‘감염합동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는 훗날 대한감염학회의 모체가 됐다.1964년 서울의대를 사직하고 옮긴 가톨릭의대에서도 그의 추진력은 명불허전이었다. 내과 주임교수로 부임한 그는 미국에서 경험한 수련제도를 도입, 매일 아침 진료 시작 1시간 전인 8시부터 학술모임을 개최하고 오후에는 임상증례 토의나 임상병리 컨퍼런스 등을 열었다. 전 교수가 솔선수범한 모임은 가톨릭의대를 바꾸어 놓았고 오늘날의 가톨릭의대로 도약하게 한 원동력이 됐다.정년퇴직한 후에는 인제의대의 초대 학장으로 부임해 의학교육의 기틀을 다지는 데 노력했다. 그는 부산에서 막 문을 연 인제의대 창설 작업에 직접 참여해 우수한 교수를 확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는 은사인 백인제 교수에 대한 사은(謝恩)과 교육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오늘날 의료인문학 교육에 해당하는 ‘의학개론’ 강의를 국내 최초로 신설했고, 1985년 이를 책으로 엮은 [의학개론]을 출간하기도 했다. 또한 전 교수는 현재의 대한의학회인 대한의학협회 분과학회협의회 회장을 1969년부터 3년에 걸쳐 역임하며 협의회를 본궤도에 올려놓았고, 대한감염학회 회장(2-8대), 대한내과학회 회장, 대한면역학회 회장(1-4대), 대한화학요법학회 회장, 대한기생충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학회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일선에서 물러난 뒤로는 한국 현대의학의 발전상을 정리한 역작들을 발표하며 귀중한 성과를 남겼다. 뿐만 아니라 우리말 의학용어를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에도 앞장섰다. 전 교수는 대한의학협회가 발간한 의학용어집 제1집과 제2집의 편집위원장으로서 일본식 한자의 의학용어가 아닌, 우리말 의학용어의 사용을 권장했다. 1999년에는 일생을 감염병 연구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성곡학술문화상 자연과학 부문을 수상했으며, 별세 후인 2010년에는 한국 의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의학회가 ‘명예의 전당’에 헌정한 원로 의학자로 선정되기도 했다.“콜레라는 일종의 빈민병이다. 예방 주사를 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펌프나 수도 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다.”위생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사회적 약자들과 가난한 이들부터 그 고통에 잠식된다고 주장한 전종휘 교수. 그는 의학연구를 할 때에도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야겠다는 야심보다 우리의 현실을 파악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모두의 의사’였다. 6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을 의학에 헌신한 그의 발자취가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라는 이름 아래 깊숙이 새겨진 이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못 가진 자들이 겪어야 할 고통을 나누기 위해 평생을 의료계에 헌신하며 ‘사람값’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던 그의 빛나는 시간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