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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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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연구로 한국 화학의 위상을 높이다

금속수소화물에 의한 유기화합물의 선택환원 반응 연구 개척
연구와 후진 양성, 연구기반 확충으로 한국 화학계의 토대 구축

세계적 연구로 한국 화학의 위상을 높이다 윤능민 금속수소화물에 의한 유기화합물의 선택환원 반응 연구 개척 / 연구와 후진 양성, 연구기반 확충으로 한국 화학계의 토대 구축학력-1945 평양고등보통학교,1951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이학사(화학),1968 미국 퍼듀대학 대학원 이학박사(화학)
경력-1969~2009 서강대학교 화학과 교수, 명예교수,1989~1990 대한화학회 회장,2005~2009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포상-1983 국민훈장 모란장,1990 대한민국 과학기술상,1993 대한민국학술원상,1995 인촌상 학술부문1979년도 노벨화학상은 유기물질 합성에 중요한 시약으로 각각 붕소와 인화합물을 개발한 허버트 찰스 브라운(Herbert Charles Brown)과 게오르크 비티히(Georg Wittig)에게 돌아갔다. 세계 화학계의 선두에서 독보적인 분야를 개척하며 그 위상을 높여왔던 브라운 교수는 수상강연회에서 한 명의 한국인 제자에게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이 연구는 많은 뛰어난 공동 연구자들에 의해 크게 촉진되었는데, 특별히 언급해야 할 사람으로 윤능민이 있다.”(It should be pointed out that these studies were greatly facilitated by many exceptional coworkers, among whom I would like to mention especially, Nung Min Yoon and S. Krishnamurthy.)한 분야의 개척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선물한 스승과 타고난 성실함과 뛰어난 능력으로 그 기회를 성공으로 연결시킨 제자. 윤능민 교수는 스승인 브라운 교수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세계적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고, 그 결과 한국 화학계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평생 학자이길 염원하며 연구와 과학인재 양성에 몰두했던 윤 교수는 순수한 열정과 노력으로 한국 화학계의 외연을 확장시킨 선도자였다. 윤능민 교수는 1927년 10월 21일 평안남도 해압면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평양적십자 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던 부친은 똑똑했던 아들이 의사가 되길 희망했다.그러나 낮이나 밤이나 바쁘게 일에만 매달리던 부친의 모습을 보며 의사의 삶에 회의를 느낀 그는 평양에서 고등보통학교까지 졸업한 후, 경성대학(현 서울대학교) 예과에 입학한 다음 화학과로 진학했다. 의사가 아닌 화학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이다.한국전쟁 발발로 부산의 임시교사에서 학업을 이어갔던 그는 1951년 3월 화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당시 부산에 임시로 이전해 있던 국방부과학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취업한 그는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하고 더불어 진정한 화학자의 길을 걷게 됐다고 안도했다. 윤 교수는 3년간 연구원으로 근무한 뒤, 가톨릭의과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겨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육자로서 그는 안정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존경받는 학자가 되고 싶었던 그에게 학사 학위는 지식의 부재와도 같았다. 더 높은 지식의 상아탑을 향해 전진하고자 했던 윤 교수는 1963년 유학길에 올랐다. 만 36세의 늦은 나이에 선택한 도전이었다. 미국 퍼듀대학 대학원 화학과로 유학을 간 그는 그곳에서 평생의 스승과 연구주제를 만나게 된다. 그의 지도교수였던 브라운 교수는 가수소화붕소 첨가반응과 함께 알루미늄과 붕소수소화합물을 이용한 선택환원 분야를 개척 중이었다. 독보적인 선도연구 분야로 어떤 연구를 하든 그 분야의 개척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윤 교수는 ‘선택환원’ 분야를 집중 연구했고, 곧 그 연구의 주체가 됐다. 1968년 박사 학위를 받은 윤 교수는 귀국 후 금속수소화물에 의한 유기화합물의 선택환원 반응의 연구를 개척하며 후속 연구를 촉발시켰다.그의 연구 업적 중 가장 선도적이라고 평가받는 부분은 금속수소화물에 의한 유기화합물의 선택환원 특성을 계통적으로 조사하는 방법론을 확립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는 점이다. 윤 교수는 56가지의 유기화합물 리스트를 작성하고, 각각의 화합물에 새로 개발한 금속수소화물을 반응시켜 그 환원 특성을 체계적으로 조사하는 연구방식을 고안했다. 각 금속수소화물에 대해 이같은 계통적 연구결과가 축적되면 연구자들은 목표에 가장 잘 맞는 시약과 합성방법을 효율적으로 찾아낼 수 있다. 이 방식은 지금까지도 연구현장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신뢰도가 높다. 또한, 그는 선택환원제 개발의 가능성을 높이며 연구 범위를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선택환원이란 유기화합물에서 어느 특정한 작용기를 선택적으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는 보레인(BH3) 등 알려진 환원제에 여러 가지 알킬기 또는 다른 치환체를 도입하여 유도체들을 개발하고 각 유도체들이 모체와 다른 환원성을 보인다는 점을 밝혔다. 개발된 유도체들은 기존 환원제와 다른 선택환원 반응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특정한 선택성이 필요한 화학반응에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윤 교수는 이 같은 기초연구를 통해 화학선택성, 위치선택성 및 입체선택성이 뛰어난 환원제를 개발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새로운 연구영역인 비대칭 가수소화붕소 반응 분야를 개척한 것도 윤 교수의 업적으로 꼽힌다. 특정물질에 가수소화붕소 반응을 시켜 카이랄성(손대칭성) 화합물을 합성하는 방법으로, 그는 카이랄성 알코올을 합성하는 기초연구를 통해 비대칭 가수소화붕소 반응의 특성을 밝혀냈다. 이는 다른 연구자들이 붕소화합물을 이용한 비대칭 합성법을 개발하는 촉진제가 됐다. 윤 교수는 서강대에서 재직하는 동안, 국내의 화학 연구 수준을 선진국 수준으로 격상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것이 바로 후학 양성이다. 그는 제자들이 자신보다 더 성장하기를 바라며 강의에 임했다. 수업 시간 10분 전에 미리 들어와 학생들을 기다리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제자들이 지금도 많다. 그의 강의는 간결하고 명쾌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는데, 엄격하지만 자상한 지도방식에 그의 연구실은 학생들의 지원이 끊이지 않아 항상 정원을 초과하곤 했다. 윤 교수의 교육 철학은 학생들이 높은 수준의 연구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아침에 출근하면 실험실에 들러 새로운 연구결과가 있는지 점검했던 윤 교수는 남다른 열정으로 학생들과 연구에 몰두하며 새로운 발견이 주는 뿌듯함을 함께 목도하는 걸 즐겼다. 그와 학생의 절묘한 합은 훌륭한 과학 인재를 양성하는 자양분이 됐다. 그는 재임 기간 중 14명의 박사와 55명의 석사를 키워냈으며, 현재 그들은 모두 국가의 과학인재로서 대학과 연구소, 산업현장에서 핵심 요직을 맡아 그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나가고 있다.한국과학재단의 우수연구센터사업에 선정되어 서강대에 유기반응연구센터를 조직하고, 센터장으로서 우수한 집단 연구를 이끌었던 점 역시 그의 대표적 업적으로 평가된다. 당시 우리나라 유기화학 분야의 대표 학자들이 모였던 유기반응연구센터는 우리나라 유기화학 분야 연구를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대표 요람이었다. 그는 센터를 조직하면서 국내에 몇 대 없었던 최첨단 기기들을 구비해 모두가 부러워하는 연구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9년간 후배와 제자들이 마음껏 연구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윤 교수는 선진국과의 기초연구 수준의 격차를 좁히기 위해 고심했다. 일본 연구자들과 함께 개최한 ‘공동 유기화학 심포지엄’도 그의 제안에서 시작됐다. 1980년부터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이 심포지엄은 소원했던 한일 관계를 해소하는 데 일조를 했을 뿐만 아니라, 두 나라 화학 연구자들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마중물이 됐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3년에 국민훈장 모란장, 1990년에 대한민국 과학기술상, 1993년에 대한민국학술원상, 1995년에 인촌상을 수상했으며, 2020년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됐다. “Professor Yoon has spread his students all over the world!”2010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스즈키 아키라(鈴木 章) 교수는 그의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계 도처에서 윤 교수의 제자들이 활약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선도 연구그룹을 통해 양성된 그의 제자들은 이미 세계적 연구자 집단으로 성장해 있었다. 
오로지 연구에 몰두하며 과학자가 국가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몸소 보여준 위대한 과학자이자 교육자인 윤능민 교수. 그가 걸어온 올곧은 과학자의 일생을 후학들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스승이 걸어간 길 위에 새겨진 발자국이 희미해지지 않도록, 후학들이 그의 길을 뒤따라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