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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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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수준의 열공학 연구를 선도하다

열공학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의 기술개발 및 인력양성을 선도
에너지산업 및 냉동산업의 발전과 학술활동의 국제화에 기여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66
세계 수준의 열공학 연구를 선도하다
노승탁
열공학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의 기술개발 및 인력양성을 선도
에너지산업 및 냉동산업의 발전과 학술활동의 국제화에 기여학력-1966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 졸업, 1969 미국 로즈홀맨공대 기계공학 석사, 1972 미국 브라운대학 기계공학 박사
경력 - 1973~2008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 기계항공공학부 교수, 1991~2000 서울대학교 터보동력기계연구센터 센터장, 1996~1997 공기조화냉동공학회(現 대한설비공학회) 회장, 1997~2001 서울대학교 정밀기계설계공동연구소 소장, 1998 대한기계학회 회장, 1998 Assembly for the International Heat Transfer Conferences 회장, 1998~ American Society of Mechanical Engineers 석학회원
포상 - 1986 대한기계학회 학술상, 1997 서울대학교 훌륭한 공대교수상 학술상, 2002 대한민국학술원상, 2008 녹조근정훈장, 2011 제8회 일진상(한국공학한림원)“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엔지니어에게는 필수 사항이라는 책임의식을 항상 가져왔습니다. 엔지니어는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서 ‘문제해결자’가 되어야 합니다.” 노승탁 교수는 에너지의 사용을 최적화하는 조건들을 연구하며 국가와 사회의 필요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삶을 살았다. 교육자이자 엔지니어로서 그가 성취해낸 성과들은 산업 발전의 마중물이 됐다. 기초연구에서 응용연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문제해결자로서의 역할을 해낸 그의 노력 덕분이었다. 노승탁 교수는 194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교장으로 봉직 중이었던 그의 부친을 따라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어수선한 시국에 전쟁과 피난생활이 계속되면서 학교를 계속 옮겨 다녀야 했다. 그는 전쟁이 끝난 중고등학교 때부터야 비로소 제대로 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노 교수는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로즈홀맨공대에서 기계공학 석사, 미국 브라운대학에서 기계공학 박사를 받았다.“과학기술에 대한 큰 꿈과 목표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가적으로 공업화가 중요한 과제였고, 기술발전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분위기였어요. 그때 상황이 저를 자연스럽게 이끌었던 것 같아요. 기계공학을 선택하게 된 이유였습니다.”(한림원과의 인터뷰)기계공학 중에서도 그가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열공학이었다. 노 교수는 자연의 법칙 안에서 열의 본질과 전도를 잘 활용하면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열공학에 매력을 느꼈다. 특히 인간이 편리한 생활을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기술이 많았다. 그는 귀국한 후 1973년부터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 교수로 활동하며, 열공학 혹은 공업열역학을 중심으로 연구, 교육, 학술교류 등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이뤄가기 시작했다. 그는 열물성, 에너지변환, 냉동공학 등의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성과를 창출했다. 특히 열물성 분야에서는 기존 물질이나 새로운 물질의 열역학적 성질을 측정 혹은 규명하여 기계장치의 설계 및 성능해석에 필수적인 열물성 자료를 제공했다. 1990년대 벌어진 오존층 파괴로 인한 신냉매 개발 사례가 대표적이다. 1987년 전 세계 23개국 대표들이 프레온 가스의 생산과 사용을 1998년까지 50% 줄이기로 합의했지만, 오존층 파괴를 막을 순 없었다. 오존층 파괴를 가속화하는 각종 가스의 방출을 줄이기로 합의한 각국 대표들은 1990년대 중반까지 파괴 물질에 대산 생산과 사용을 강력히 규제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가장 시급한 것은 프레온 가스를 대체할 신냉매를 개발하는 일이었다. 프레온 가스가 냉방기나 냉장고의 냉매와 발포성 단열제의 충전제로 이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기술 강대국들과 대기업들이 개발에 앞장섰고, 우리나라 역시 새로운 냉매를 사용하는 냉동기기를 설계·제작하는 데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각종 열물성 연구가 응용돼야 했고,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관련 연구를 수행해 온 그의 연구가 맞춤으로 적용될 수 있었다. 노 교수는 이때의 업적을 인정받아 2002년 대한민국학술원상을 수상했다.또한, 그는 발전소의 효율을 높이는 방안을 마련해 에너지 절약은 물론, 수입 에너지원의 합리적인 이용을 가능하게 했다. 무엇보다 효율적인 운전을 위한 최적의 조건들을 제시하는 게 중요했다. 이를 위해 그는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급변하는 기술의 발전 과정에 맞춰 효율을 증가시키는 방법을 연구함과 동시에 외국 기술에 의존했던 기술을 우리나라에 적합한 형식으로 변형해 도입하는 방안을 고민했다. 그 결과 지역난방으로 대표되는 난방시스템이 정착될 수 있었고, 각 지역에 세워진 지역발전소는 세계적인 관심을 받을 정도로 혁신을 인정받았다.그만의 에너지변환 기기에 대한 해석은 우리나라 발전설비의 설계기술을 크게 향상시켰다.냉동 공학 분야에서는 냉방 및 냉동 시스템의 효율성 향상에 기여하여 하절기의 전력 피크를 관리하고 소비전력을 감축하는 데 기여했다. 이와 같은 그의 연구를 매개로 우리나라 열공학은 학문적으로 크게 성장했으며, 에너지산업과 냉동산업 역시 세계적 수준에 이를 수 있었다.“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연구 역시 그냥 열심히 했을 뿐이에요. 그것뿐입니다.”(한림원과의 인터뷰)노 교수는 교육과 연구를 병행해야 하는 삶을 만족스러워 했다.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하는 삶은 그에게 긍정적인 자극이 됐다. 그의 밑에서 수학한 후학들이 우리나라 학계, 산업계, 관계에서 기계공학을 매개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었던 것도 학문을 향한 그의 끊임없는 노력 덕분에 가능했다. 그는 기계공학의 연구와 교육 선진화의 기틀을 세운 진정한 스승이었다. 서울대학교 교수로 35년 동안 재직하면서 석사 113명, 박사 30명을 배출한 그는 연구에서도 200여 편의 연구논문을 게재하며 탁월한 연구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교재 집필에도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가 1986년 학생들을 위해 집필한 <공업열역학>은 현재까지도 열공학 분야 대표 교재로 사랑받고 있다. 이밖에도 그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주관한 <과학기술용어집>의 편찬과 한국공학한림원이 주관한 <한국산업기술발전사>의 편찬에서 우리나라 기계공학의 대표자로 큰 역할을 담당하며 대학자로서 널리 존경받고 있다. 노 교수는 학술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한국 열공학 분야 수준 향상에 일익을 담당했다. 
그는 공기조화냉동공학회(현 대한설비공학회)와 대한기계학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 기계공학의 교육과 연구를 선진화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서울대 터보동력기계연구센터와 정밀기계설계공동연구소를 맡아 대학과 산업체를 연결하는 토대를 구축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열공학 분야의 국제저널 편집위원과 국제학술회의 조직위원장을 여러 차례에 걸쳐 맡기도 했다. 1998년에는 국제열전달학술회의연합회(Assembly for the International Heat Transfer Conferences, AIHTC)의 회장을 지냈으며, 미국기계공학회(American Society of Mechanical Engineers, ASME)의 석학회원(fellow)으로 선출됐다. 2009년 열공학 분야의 최고 저널인 International Journal of Heat and Mass Transfer에서 노 교수의 업적과 은퇴를 기념하여 “In Celebration. Professor Sung Tack Ro on his 65th birthday”라는 기념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주어진 조건이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그 조건에서 최선의 방안을 찾는 엔지니어들이 더 많아지길 바랍니다.”탁월한 연구자이자 교육자로 엔지니어의 역할이 무엇인지 늘 고민했던 노승탁 교수. 열공학 분야 발전을 위해 오로지 연구와 강의에만 몰두하며 학문적 지평을 넓혀가고자 했던 그의 행보는 우리나라 열공학 분야의 수준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기반이 됐다. 우리나라 과학기술계 진정한 학자로 새로운 도전의 성공을 위해 산적한 난제들을 소통과 협의로 해결해 나갔던 그는 많은 후학들의 존경을 받으며 오늘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흥미를 갖고 성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도전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그의발걸음은 새로운 길을 내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