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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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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상학과 기상예보의 현대적 기반을 마련하다

고도의 기상예보 기술 확보를 위한 중앙관상대의 기상시스템 현대화
한국기상학회와 <한국기상학회지> 창설로 한국 기상학의 제도화 마련

한국 기상학과 기상예보의 현대적 기반을 마련하다  故국채표
고도의 기상예보 기술 확보를 위한 중앙관상대의 기상시스템 현대화
한국기상학회와 <한국기상학회지> 창설로 한국 기상학의 제도화 마련 학력-1931 연희전문학교 수물과(數物科) 졸업, 1941 교토제국대학 수학과 졸업, 1958 미국 시카고대학 기상학과 졸업, 대학원 이학석사, 1960 미국 위스콘신대학 기상학과 박사과정 수료, 1964 일본 교토대학 이학박사
경력-1929~1938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1941~1945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감, 1946~1949 국립중앙관상대 부대장, 1955~1956 캘리포니아 미군 제6군단 강사, 1961~1967 제2대 중앙관상대 대장, 1963~1968 한국기상학회 초대회장“인공강우로 비를 내리게 하겠습니다.”1962년 당시 우리나라는 극심한 가뭄을 겪고 있었다.정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했지만, 해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출처 : 한국일보, 역대기상청장 어떻게 지내나(인물광장), 1993.01.25.)
그때 한 명의 전문가가 나섰다.  ‘세종대왕 이래 최고의 기상학자’라고 평가받던 국채표 당시 중앙관상대장이었다. 그는 당시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하늘엔 비만들기에 안성맞춤인 좋은 구름이 참 많습니다. 비의 응결핵만 공급해주면 비를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경제성을 입증하지 못해 그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가 탁월한 기상학자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시대를 앞서간 초인(超人) 국 박사는 한국 기상학과 기상예보의 현대적 기반을 마련한 선구적인 기상학자였다.1906년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태어난 국채표 박사는 1918년 담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20년까지 고향에서 한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당시 담양은 ‘창흥의숙(昌興義塾, 현재 창평초등학교)’을 중심으로 근대교육을 정착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국 박사는 자연스럽게 신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1920년 경성으로 올라가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5년간 공부한 그는 졸업한 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 입학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는 조선 내에서 유일하게 고등 수학을 배울 수 있는 교육기관이었다. 수물과를 졸업한 뒤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사로 수년간 재직했다. 그는 교사로 활동하면서 신문과 잡지에 과학 관련 글을 꾸준히 게재하고, 라디오 방송에도 출연하며 과학정보를 전달했다. 주로 자연변화나 대기현상, 기상현상 등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기상학의 길을 걷게 된 건 해방 이부터였다. 교사직을 사임하고 1938년 일본 교토제국대학 이학부 수학과에 입학한 그는 1941년 졸업 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감으로 부임했다. 5년간 교감으로 재임한 국 박사는 해방 후 국립중앙관상대 부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국 최초의 이학박사이자 연희전문학교 스승이었던 이원철 박사의 추천으로 마침내 기상학의 세계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됐다. 부대장이 된 그는 ‘고층권 기상연구’의 책임자가 됐다. 고층권 기상연구를 위해선 상층 대기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는데, 이를 위해선 기상관측기구를 높이 올릴 수 있어야만 했다. 당시 우리나라보다 과학기술이 더 발달했던 일본도 5km 상공까지만 올릴 수 있었다. 이 난제를 해결한 건 국 박사였다. 그는 주변의 우려가 무색하게 이 기구를 23km 상공까지 올리는 데 성공했다. 최빈국이었던 한국이 거둔 쾌거였다. 언론에서는 미래 한국 항공기술에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며 이 소식을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기상학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싶다는 열망으로 그는 미국으로의 유학을 결심했다. 관상대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려면 기상학을 전문적으로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내린 결단이었다. 또한, 기상분야 전문가의 인력난이 심각하다는 것도 결단의 배경이 됐다. 그는 스스로 기상 분야의 고급 기술을 습득해 인재양성에 앞장서야겠다고 결심했다. 1949년 시카고대학 기상학과에 입학한 그는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수료하고,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미군 제6군단에서 강사로 2년간 근무했다. 대학으로 돌아온 뒤에는 미 해군으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아 ”On the prediction of three-day hurricane motion“이라는 성과를 발표했고 1958년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하여 인정받았다. 국 박사의 연구는 당시 미연방 기상국에서 인정하는 기상연구의 주요 성과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뛰어났다. 그는 시카고대학교를 졸업한 후 위스콘신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연구를 이어갔다. 그러나 중앙관상대 책임자 자리를 맡기 위해 서둘러 귀국하는 바람에 박사학위를 받지는 못했다. 1961년 귀국한 국 박사는 이원철 초대 관상대 대장의 후임으로 제2대 중앙관상대 대장에 임명됐다. 
대장이 된 그는 한국 기상시스템의 체계 확립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국 박사는 기상예측에 필요한 기자재를 정부에 요청하고, 미국에서 배운 기상학에 기반한 새로운 방법을 국내 기상예보 시스템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우리나라 기상예보 시스템은 일제강점기 시대에서 활용된 낙후된 시스템이었다. 더군다나 대중을 위한 현업 적용이 제한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를 표준화해 활용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국 박사는 관측 시스템을 표준화하고 이를 위한 법령을 정비했다. 그리고 새로운 분석시스템을 정립해 현대적 기상예보 시스템의 토대를 구축했다.우선 그는 이미 선진국 각 도시에서 편리하게 활용되고 있는 기상예보 시설의 설치를 진행했다. 전화를 통해 일기예보를 자동응답으로 전달받는 <자동일기예보기> 설치, 고층대기권의 기상 현상을 관측할 <고층기상관측소> 설립, 해외 기상도를 실시간으로 전달받을 <기상 팩시밀리> 구입 등을 추진하며 현대적인 기상시스템을 도입하는 데 앞장섰다.그는 1964년에서야 일본의 교토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제출한 “한국 및 한국 부근에 내습할 우려가 있는 태풍의 운동 및 중심시도의 통계적 예보법“(1964)이라는 논문은 그가 시카고대학 시절부터 연구해온 내용을 발전시켜 한국에 적용한 것이었다. 한국 기상학 분야 최초 이학박사 학위였다. 태풍진로 예상법을 제안한 그의 논문은 당시 획기적인 발상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이는 ‘국(鞠)의 방법(Kook’s Method)’으로 세계에 알려졌다. 우리나라 기상예보에도 활용됐다.‘국의 방법’이란 한반도와 일본으로 접근하는 태풍의 강도와 진로를 예측하는 것으로,태풍의 역학적 구조를 반영한 기상인자를 다중회귀 통계기반 예보 방정식에 대입해 태풍 경로를 예측하는 방법이다. 그가 제안한 국의 방법은 기존의 방법보다 예측력이 뛰어났으며, 특히 그가 연구한 ‘태풍의 3일간 예보법’은 당시 미국 기상학계에서 그대로 수용했을 정도로 그 탁월성을 인정받고 있었다. 이 같은 예보법은 현재 우리나라의 기상예보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국 박사는 낙후된 한국 기상학의 발전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을 보탰다. 1963년 한국기상학회 창립을 주도하고 초대회장으로 선출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기상학을 연구하는 학자간 교류와 기상학을 배워갈 후진들의 양성 부분이었다. 그는 중앙관상대 기술연구원들과 관련 대학 교수들과 함께 한국기상학회를 창설하고, <한국기상학회지>를 1965년 창간하며 한국 기상학의 제도화에 앞장섰다. “농업국인 우리나라에 인공강우법을 써서 보다 살찐 땅을 만들려는 것이 내가 귀국한 목적의 가장 큰 것입니다.”국채표 박사의 소망은 농업국인 우리나라가 부유해지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선 기상학의 발전이 필수적이었다. 교직 생활을 포기하면서까지 우리나라의 기상예보 기술과 기상학의 제도적 발전을 이끄는데 앞장섰던 국채표 박사. 그가 남긴 유산은 오늘날 세계적인 수준으로 평가받는 한국의 기상학 및 기상예보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빛나는 그의 업적과 달리 그의 이름은 역사의 뒤안길에 적막하게 남아있었다. 정부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의 명예를 헌정했다. ‘국채표’라는 이름이 업적과 함께 영원히 빛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