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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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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연구개발 체제 구축과 도약에 기여한 과학기술행정가

이공계 대학원 교육 모델 제시 및 우수연구센터 육성정책 이론 개발 및 추진
핵융합로, 한국형원전 설계, 원자력 위험통제 등의 개발에 공헌

 

국가 연구개발 체제 구축과 도약에 기여한 과학기술행정가
정근모
이공계 대학원 교육 모델 제시 및 우수연구센터 육성정책 이론 개발 및 추진
핵융합로, 한국형원전 설계, 원자력 위험통제 등의 개발에 공헌 학력
1955~1959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1959~1960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
1960~1963 미국 미시간주립대학 대학원 이학박사 (응용물리학)

경력
1971~1975 한국과학원 부원장
1982~1986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 사장
1988~1990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1989~1990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 의장
1990, 1994~1996 과학기술처 장관 (제12대, 제15대)
1992~1994, 1998	 고등기술연구원 초대원장, 2대 원장
2004~2007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

포상
1986 은탑산업훈장
1991 청조근정훈장
1998 세계원자력한림원상
2001 장영실과학문화상 가난한 나라의 과학기술자는 자신의 지식·경험을 조국의 국민이 잘살게 하는 데 바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자네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달라.“

1960년 미국 유학을 앞둔 한 청년에게 김법린 초대 원자력원장은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한 작은 밀알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존경해 마지않던 스승의 조언에 ‘조국의 가난 탈출’을 목표로 학문을 수학했던 청년의 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의 이름은 대한민국 과학기술 연구개발 성장에 기여한 과학기술행정가, ‘정근모’ 였다. 정근모 박사가 걸어온 길은 대한민국 현대 과학기술의 역사가 됐다. 과학기술처 장관을 두 차례 역임하며 과학기술 입국의 밑그림을 설계했으며, KAIS(현재의 KAIST)와 고등과학원의 설립을 제안하고, 한국인 최초로 핵융합 연구를 시작해 표준형 원자로 탄생의 기반을 마련하는 등 업적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다. 초일류 대한민국 건설을 위한 그의 노력은 ‘희망’이라는 밀알이 되어 국가 과학기술 발전을 진전시켰다. 그는 1939년 12월 교육자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전국 최고의 수재들만 모인다는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며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고등학교를 1년 만에 수료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물리학과)에 차석으로 입학한다. 1955년, 그때 나이 불과 16세였다.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그의 관심은 여러 분야에 걸쳐 있었다. 졸업 후 진로 문제를 두고 고심하던 차에 벽보판에 붙은 안내문을 보고 행정대학원 진학을 결심한 것도 이러한 그의 성향과 무관치 않다. 1959년 대학 졸업 후 행정대학원에 수석으로 입학한 그는 그곳에서 ‘인생의 멘토’ 김법린 초대 원자력 원장을 만날 기회를 얻게 된다. 행정대학원의 또 다른 특징은 ‘수습행정원(지금의 인턴)’ 제도가 있었다는 점이다. ‘현장 행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갓 출범한 원자력원에 자리를 얻어 나간 그는 그곳에서 김법린 원장의 보좌역 비서를 맡게 된다. 복잡한 과학지식이 요구되는 업무가 어떻게 처리되는지 눈앞에서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철학자였지만 원자력원의 초대 수장이 된 김법린 원장과 이공계 대학생이지만 행정대학원에 입학한 그는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줄 수 있는 좋은 파트너였다. 그가 미국 유학의 행운을 얻게 되자 김 원장은 그를 사무실로 불러 “유학에서 얻은 과학지식으로 어려운 조국을 위해 헌신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라가 잘 살기 위해 과학기술이라는 비료가 필수적이라는 김 원장의 소신은 그의 인생의 나침반이 됐다.  
1960년 미국 미시간주립대학으로 유학길에 오른 그는 23세에 박사 학위를 받고(논문: Molecular asymmetric-top vibration-rotation Hamiltonians), 그 이듬해부터 남플로리다대학 조교수, MIT 핵공학과 연구교수를 거쳐, 뉴욕공대 전기물리학과 부교수로서 연구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물리학 외에도 미국의 전반적인 과학기술 생태계를 파악하는 데 높은 관심을 보였다. 1969년 뉴욕공대 교수로 있던 중 그는 운명적인 뉴스를 접하게 된다. 존 해너(John A. Hannah 1902~91년) 미시간주립대 총장이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처장을 맡았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해너 처장이 취임사에서 “후진국(나중에 개발도상국으로 순화)에 물고기를 주는 대신 낚시 방법을 가르치겠다(Instead of giving fish, we will teach them how to fish)”고 말한 것을 보도했다. 물자 지원에서 인재 육성으로 대외 원조정책의 방향이 바뀐다는 의미였다.  당시 한국은 열악한 연구 환경 때문에 많은 인재가 해외로 떠나는 이른바 두뇌유출 현상을 겪고 있었다. 이에 정 박사는 하버드행정대학원에 다니면서 썼던 “후진국에서의 두뇌 유출을 막는 정책 수단”(Policy tools to prevent brain drain out of underdeveloped countries)이라는 논문을 들고 해너 처장을 찾아갔다. 논문을 본 해너 처장은 사업계획서를 요청했고, 그는 “한국에 응용과학 및 공학 전문대학원을 설립하는 안건”이란 제안서를 만들어 넘겼다. 해너 청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공계 특수대학원 설립을 권고하는 편지와 이 제안서를 동봉했다. 한국이 사업 추진을 결정하면 미국 국제개발처(USAID)가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에 새로운 이공계대학원 설립을 제안한 그는 1970년 과학기술처 김기형 장관의 초청으로 귀국길에 오른다. 정부의 적극적인 의지로 한국과학원 설립은 물꼬가 트기 시작했다. 한국과학원은 기존 문교부 중심의 고등교육 시스템이 아닌, 과학기술처 산하에서 고급인력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특수 교육기관으로 설립됐다. 한국과학원의 방향 및 설계를 주도한 정 박사는 1971년 한국과학원 초대 부원장으로 임명됐다. 
과학기술 인재 육성을 목표로 설립된 기관인 만큼 병역 혜택은 물론 무료 기숙사 제공, 학비 면제, 장학금 지급 등 전폭적인 지원도 함께 이뤄졌다. KAIST가 오늘날 대한민국 과학기술 인재 양성의 요람으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과학기술로 경제를 일으켜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다. 정 박사는 과학기술 정책가로서의 면모를 발휘하는 과정에서도 핵융합, 원자력 기술에 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에너지 빈곤국가일수록 원자력 에너지를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그였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기에 원전 건설이라는 원대한 포부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이에 정 박사는 1982년 한국전력기술 사장으로 부임해 한국형 원전 개발에 나섰다. 연구기관과 기술회사가 함께 발전해야 한 나라의 과학기술이 실질적인 국가 발전을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한 정 박사는 한국형 원전 표준 설계 사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했고, 그 결과 국내 원자력발전 사업의 주축을 이루는 12개의 한국표준형원전이 탄생했다. 독창적인 연구로 개발된 한국표준형 원전은 선진국이 설계한 원전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크게 개량된 것이었다. 한국형 원전의 안전도는 사고확률 면에서 선진국이 설계한 원전의 10분의 1에 불과했으며, 우리나라 업계의 실정에 맞게 설계돼 원전 건설비용을 줄여 주는 효과도 있었다. 이 기술을 기반으로 우리나라는 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출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정 박사는 2009년 한국전력공사 고문으로 원전 사업을 기획해 수출의 기적에 기여했다. 과학기술계 주요 인사로 떠오른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곳은 많았다. 정 박사는 1988년부터 1990년까지 한국과학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했고,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두 차례에 걸쳐 과학기술처 장관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국내 기초연구 및 집단연구를 장려하기 위해 과학연구센터(SRC), 공학연구센터(ERC) 등 우수연구센터 육성정책 이론을 개발하고 추진했다. SRC, ERC 사업은 한국에서 연구중심 대학 개념이 제도적으로 정착하고 국제적 연구 경쟁력을 갖추는 데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스승의 조언으로 스스로가 과학기술 발전에 한 알의 밀알이 된 것처럼, 그는 올바르게 성장한 인재들이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다고 믿었다. 인재양성에 앞장선 것도 바로 이 이유에서다. 원자력 인재를 위한 한전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교 설립에 힘쓴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그는 아주대학교 석좌교수로 부임해 에너지문제연구소 신설과 에너지학과의 대학원 과정을 개설하는 데 앞장섰고, 명지대학교와 호서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며 인재들의 요람인 대학이 나아가야 할 길을 고민했다. 그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 의장직을 수행하며 원자력 발전의 위험 거버넌스 구축에 앞장섰고, 한국핵융합연구시설(KSTAR)의 확립에도 기여했다. 이와 함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고등과학원 설립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며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데 힘썼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한국과학원 설립 공로패, 은탑산업훈장, 청조근정훈장, 장영실과학문화상, 캐나다 원자력협회 국제공로상, 세계원자력한림원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의 전미 과학·공학·의학 한림원(NASEM) 회원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초일류 국가 대한민국을 만드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물꼬는 터졌습니다. 과학기술을 국가의 원 동력으로 사람 중심의 두뇌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고 새로운 가치 창출에 나선다면, 그리고 인류 공동체를 위한 꿈을 꾼다면 가능합니다.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합니다. 실천하면 됩니다. 과학기술경제라는 키워드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과학기술경제에는 지평선이 없어요. 무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것을 빼앗을 필요가 없어요. 기술혁신을 통해 새로운 경제를 일으켜서 우리도 잘 살고, 이웃도 잘 살게 만들면 초일류 국가 대한민국으로 갈 수 있습니다.” (2020년 한림원 인터뷰 중) “과학기술이 밥이다.”

돈도, 기술도, 인재도 없었던 그때, 과학기술인들은 울분에 차 있었다. 기술종속의 시대에서 살아남는 건 참으로 아득한 어둠을 견뎌내야 하는 슬픔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과학기술만이 국가를 먹여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은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 박사는 그 믿음을 실현시키기 위해 조국 땅에 ‘희망’을 심는 밀알이 됐다. 한 길만을 오롯이 걷는 삶, 그 헌신의 삶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기반이 되었다.
국민이 사람답게 살고, 마음껏 능력을 발휘하며, 겸허하게 자존심을 지켜낼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는 나라만이 국민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 정근모 박사. 그는 여전히 자신의 신념을 지켜가기 위해 스스로의 쓰임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