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밀화학 산업의 기틀 마련
수입에 의존하던 의약품·농약 원제의 국산화
물질특허 시대에 대비한 신물질 창출 연구체제 구축
과학기술 진흥 정책 추진 및 과학기술 행정 혁신

정밀화학 산업은 석유화학 산업에서 생산되는 기초화학 제품을 공급받아 자동차, 선박, 전자, 섬유, 건축, 의료기기 산업 등 전방 산업에 원·부자재를 공급하는 소재산업으로, 산업적 파급효과가 큰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정밀화학산업이 제공하는 소재나 제품, 혁신 기술이 환경과 자원, 에너지 분야뿐 아니라 IT, BT 등 21세기 신사업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신소재, 신물질 개발 성공 시 엄청난 이익 창출이 가능하다.
이처럼 산업 전반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정밀화학산업의 개념을 국내에 도입하고 국가 차원의 육성 방안을 수립하여 관련 산업의 발전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 바로 채영복 박사다.
채영복 박사는 1959년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이승만 정부의 원자력원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독일 뮌헨대학에서 유기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국내 정밀화학산업의 발전을 위해 1969년 귀국 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유기합성연구실장으로 부임하여 당시 수입에 의존하던 의약품과 농약 원제의 국산화 연구를 시작하였다. 당시 유기화학제품수출입 동향을 분석하여 고가이면서 수익성이 좋다고 판단되는 의약품 및 농약 분야의 국산화 연구에 착수했다. 기술 인력과 인프라가 전무했던 당시로는 원제를 직접 국내에서 생산하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이 분야의 원제 대부분이 특허등록이 되어 있었기에 이를 합성하려면 우선 특허에 등록되어 있는 합성방법들을 피해 새로운 합성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당시 국내 산업계에 협력할 수 있는 기술진이 전무하여 연구가 끝나도 기술이전을 해주기 힘들었고 필요한 연구기자제를 국내에서 시의 적절하게 조달할 수도 없었다. 소모되는 연구비에 상응하는 수익성이 있다는 신뢰가 구축되지 못한 상황에서 큰 연구비를 조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수입하던 의약품 원제 값이 매우 고가여서 연구 과제를 경제성 있게 성공시키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고 이후 수입에 의존하던 의약품 및 농약 원제 대부분을 국산화에 성공하였다.
채영복 박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국내 기술로 생산된 제품을 물질특허제도가 아직 도입되지 않은 동구권과 동남아에 수출을 하였고 이를 통해 이 분야의 산업이 활기를 띠고 빠른 속도로 성장을 하게 된다. 그러자 관련 다국적기업들이 우리나라의 기술개발활동을 견제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에 물질특허제도를 도입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채영복 박사는 일찍이 이에 대비하여 1982년 한국화학연구소 소장으로 부임 후 우리나라도 신물질 연구를 해야겠다는 선견지명으로 1984년부터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후 1987년 물질특허가 도입된 후 미국의 농약회사 FMC(Federal Maritime Commission), 독일의 의약품 제조사 훽스트(Hoechst) 등 다국적 기업들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신약·신농약 개발에 필요한 요소 기술들을 확보했다.
이런 성과들을 바탕으로 의약원료 및 농약원료 등의 산업이 고부가가치 고수익 산업임을 입증하였고 이를 통해 ‘정밀화학’이라는 새로운 산업 개념을 국내에 도입하고 국가 차원의 육성 방안을 수립하여 관련 산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2002년에는 과학기술부 장관으로 취임하여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혁신적인 정책들을 추진했다. 이공계 기피 현상이 만연했던 당시 과학기술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나가고 과학기술인의 처우개선을 위해 힘썼다. 그는 우리나라 GNP가 약 100불 정도에 불과하던 1960년대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대한민국 경제 자립을 이루는 데 일조하였다. 대한민국의 정밀화학 산업의 발전과 과학기술 행정의 혁신을 이룬 채영복 박사는 우리나라가 세계 속의 기술 강국으로 나아가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Q. 서울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하시고 국비장학생으로 독일에 유학하면서 유기화학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유기화학에 특히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학창시절 원래 유기화학보다 생명과학분야에 관심이 많았지만 은사님의 영향으로 생화학과 미생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독일 뮌헨 막시밀리안대학의 생화학교수 린넨을 찾아가 제자로 받아줄 것을 간청하여 승낙 받았으나 디플롬(Diplom)과정을 이수하여야 했고 디플롬(Diplom)과정 중 유기화학 실험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그 과정에서 유기과학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Q. 의약품 분야와 농약 분야에서 다양한 원제의 국산화 기술을 개발하는 성과를 내셨습니다. 당시 연구를 이어가면서 성과를 내기까지 과정에서 어떤 노력이 있으셨나요?
당시 우리나라 제약 업계나 농약 업계 기술 수준이 외국의 다국적기업과 기술제휴를 하고 원제를 공급받아 이를 타블렛이나 캡슐로 제제화하여 시판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는데요, 이런 원제들이 모두 특허등록이 되어 새로운 합성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하였습니다. 당시 수입 원제들이 고가여서 경제성 있는 합성방법을 찾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국산화 연구의 경제성을 확신하지 못 하는 상황에서 민간기업의 투자가 쉽지 않았어요. 다행히 연구 성공 사례가 나오자 연구 용역을 하려는 기업이 늘었고 당시 성공한 국산기술을 보호하려는 정부 시책 덕분에 연구가 활발해질 수 있었어요. 이후 약 10여 년간 수입에 의존하던 대부분의 의약품 원재들을 국산화할 수 있었습니다.
Q. 특히 카바메이트계 살충제 제조에 필요한 MIC(메틸이소시아네이트) 생산 공정을 개발하여 인도 보팔 참사와 같은 대형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을 선보이셨는데요, 이런 성과로 인해 생산 환경의 변화가 있었나요?
카바메이트계 살충제의 제조 과정 중 메틸아이소사이안산(MIC)을 생성할 때 1차 세계대전당시 전쟁에 사용하던 독가스인 포스겐을 사용하여 대량생산을 하는데요, 1984년 미국의 유니언 카바이드사인도 보팔 공장에서 독가스가 포함된 메틸아이소사이안산(MIC)가스가 누출되어 약 50만 명이 사망 및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포스겐을 가스로 외국에서 구매해오려면 고압 가스실린더를 활용해야 하고 다루기가 힘들 뿐 아니라 국내 시장이 작아 거대장치가 아닌 소량생산에 적합한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무기물질인 나트륨시안산염과 디메틸설페이트반응을 통해 메틸아이소사이안산(MIC)을 합성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유니언 카바이드사생산공정은 대량의 MIC를 생산하여 보관했다가 다음 화학반응을 활용하여 최종 생산물질을 만드는 방법이라 대량의 MIC를 생산하여 보관하는 것이 불가피해 안전성이 떨어지지만 우리나라 기술은 MIC가 생성되자마자 바로 다음 과정에서 흡수 반응하여 MIC의 바깥 노출이 전혀 없습니다. 보팔 참사 후 우리 기술의 우수성이 입증되어 기술 수출 상담이 오고가기도 하였습니다.
Q. 1982년 한국화학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하여 곧 도래할 물질특허 시대에 대비해 신물질 창출 연구체제를 구축하였습니다. 이런 선견지명으로 다국적 기업들과 공동연구를 통해 신약·신농약 개발에 필요한 요소 기술들을 확보하였는데요, 이를 통해 국내 신약·신농약 개발 분야에 어떤 이점이 있었을까요?
물질특허 도입의 도화선이 된 것은 바로 우리나라의 성공적인 연구 성과 때문입니다. 의약품 및 농약의 원제를 국산화하자 외국에서 견제가 들어왔고 물질특허를 도입하라는 압력이 가해졌습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선진국처럼 신물질을 만들어내고 물질특허를 등록하는 기술혁신 단계로 진입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물질특허제도가 1987년에 도입되었는데 이에 대비하여 신물질 연구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 1984년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인프라가 부족했기 때문에 외국의 다국적 기업들과의 오픈 이노베이션을 시도하여 공동연구를 하게 되었고 신약·신농약 개발에 필요한 요소 기술들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Q. '정밀화학'이란 새로운 산업 개념을 도입하고 국가 차원의 육성 방안을 수립하여 관련 산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이러한 성과가 우리 산업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요?
1970년대에는 우리나라에 정밀화학이란 개념이 없었습니다. 당시 우리 연구팀에서 의약 및 농약 원료의 국산화를 성공하였고 이를 통해 이 분야의 산업이 고수익 산업임을 입증할 수 있었어요. 이를 계기로 정밀화학산업이라는 산업군을 만들고 이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포함하여 우리나라 산업화에 일조하였습니다.
Q. 2002년 과학기술부 장관으로 취임하신 후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혁신적인 정책들을 많이 추진하셨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이나 보람 있었던 일이 있으셨나요?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 말에 임명되어 1년 3개월 정도 장관에 재임하였습니다. 재임 기간이 매우 짧지만 이 기간 내에 이공계 기피현상을 해결하는 것이 국가의 존립 차원에서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건립, 최고 과학기술인상 제정, 연구원 연금제도 구축 등 과학기술인의 처우개선과 사회적 위상을 높여나가는 정책을 펼친 것이 가장 보람 있었습니다.
Q. 장관 시절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설립,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 유치, 대덕연구단지 발전 등 과학기술 진흥을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전문 연구 인력을 양성하고 연구자들이 좋은 환경에서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셨는데요, 연구 인력 발굴과 성장을 위해 특히 중점을 두신 부분이 있나요?
창의력은 교과서에서 배우는 지식이 아닌 실험 등을 통해 체화하는 암묵적 지식에 의해 발현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따라 연구현장에서 국가연구개발사업에 직접 참여하여 연구하면서 학위를 받을 수 있는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를 설립하였고 우리나라 과학기술자들이 마음껏 연구할 수 있도록 외국의 유명연구소들의 국내 유치를 추진하였습니다.
Q. 유공자님께서 지치지 않고 한 분야에서 연구하고 매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치열한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셀프 모티베이션’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외부의 자극이나 보상보다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동기를 부여하려고 합니다.
Q. 우리나라 과학기술계 발전을 위해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모방위주의 과학기술 생태계에서 발전해왔다면 이제는 새로운 시스템으로 혁신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고 후진들은 그동안 인류공동의 지식창고에서 빌려다 쓴 기초지식들을 스스로 만들어가며 되갚아 나가야 할 때입니다. 남이 만들어놓은 발명이나 이론을 모방하고 확장시키는 수준에서 한 단계 도약하여 창조적인 기술을 개발해야 할 때입니다. 이를 위해 새로운 분야에 대해 도전하고 시스템의 혁신을 이루어 세계를 선도하는 과학기술 강국이 되길 바랍니다.
Q.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되신 소감 부탁드립니다.
부족한 제 업적을 과분하게 평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유공자로서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에 좀 더 기여해야겠다는 책임감이 생깁니다.
Q. 과학기술유공자로서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그동안 내가 얻은 경험과 지식을 책으로 쓰고 공유하여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채영복 박사는 1959년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독일 뮌헨대학에서 유기화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69년 귀국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유기합성연구실 실장으로 부임하여 수입에 의존하던 의약품과 농약 원제의 국산화 연구를 시작하였다. 다국적기업이 특허로 보호하고 있는 고가의 의약품과 농약의 원재를 새로운 제조공법으로 합성하는 데 성공하여 국산화하였다. 1982년에는 한국화학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하여 물질특허 시대에 대비한 신물질 창출 연구체제를 구축하였고 이후 이를 토대로 다국적기업들과 공동연구를 통해 신약 및 신농약 개발에 필요한 요소 기술을 확보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 정밀화학이라는 새로운 사업 개념을 도입하고 국가 차원의 육성방안을 수립하여 관련 사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는 한국 정밀화학산업의 선구자인 동시에 과학기술 행정의 혁신가다. 2002년 과학기술부 장관으로 취임하여 다양한 정책을 통해 과학기술 진흥을 위해 앞장섰다. 수입 의존형 산업구조를 자립형으로 전환하고 모방형 연구개발을 창조형으로 제고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채영복 박사는 청조근정훈장(2004)과 프랑스 레지옹도뇌르 훈장(2006)을 받았으며, 3.1문화상(1980)과 국민훈장 동백장(1976) 등을 수상하며 국내외에서 인정받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 세계 속에서 기술 강국으로 인정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앞으로도 과학기술 생태계의 혁신과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 및 투자를 통해 세계 과학기술을 선도하는 과학기술 강국으로 거듭나길 바랍니다.”
채영복 과학기술유공자 인터뷰 영상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