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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타자기로 한글에 눈을 뜨게 해준 안과의사 '공병우'

작성일
2025-03-04
조회수
5,288

 1_공병우.jpg 이미지입니다.

 

‘고집이 세서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벽창호’라 한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호수인, 압록강 수풍호(水豊湖)를 끼고 있는 평안북도 벽동(碧潼)과 창성(昌城) 지역의 소가 덩치가 크고 성질이 억세다는 뜻에서 나온 ‘벽창우’(碧昌牛)가 변한 말이다.

고향의 억센 기운을 받아서일까, 벽동 출신의 공병우는 평생 ‘벽창우’처럼 고집스러운 삶을 살았다. 쌍둥이를 임신한 어머니는 1907년 소에게 여물을 주다 외양간에서, 그리고 실려온 안방에서 아들을 하나씩 낳았다. 안방에서 탯줄을 끊은 동생은 바로 죽었지만, 외양간에서 태어나 소처럼 고집스럽게 자라난 첫아들이 바로 공병우다.

아흔 남짓한 삶에서 공병우는 안과 의사로 눈이 아픈 환자의 눈을 뜨게 해주다가, 스스로 한글에 ‘눈’을 뜨면서 다른 사람에게 한글의 ‘눈’을 뜨게 해주는 삶을 살았다. 겹치는 기간을 포함해서 대략 안과의사로 30년, 한글 타자기 개발자로 30년, 한글 운동 후원자로 30년을 산 것이다. 오로지 다른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는 ‘안과의사’로서의 삶이다.

어릴 때 머리를 땋고 한자를 공부하는 서당에 가기 싫어 꾀병을 부리다가 동네 한의사에게서 따끔한 침 ‘맛’을 경험한 공병우는 “꾀병 정도는 금세 분간할 줄 아는 진짜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려운 과정을 ‘벽창우’처럼 밀어붙였다. 바로 도립평양의학강습소(평양의전)에 합격해서, 갓을 쓰는 약관(弱冠)의 나이(20)에 의사면허를 따고, 10년 뒤 일본 나고야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인 최초의 안과 전문박사다.

1938년 서울 재동(안국동) 사거리에 한국 최초의 안과 전문병원 ‘공안과’를 열었다. 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환자들이 자꾸자꾸 찾아왔다. 붉게 충혈된 눈을 살펴본 공병우는 ‘병원에 더 오지 말고, 약도 쓰지 말고, 깨끗한 생리식염수로 씻어라’는 처방을 내렸다.

환자들은 약을 쓰지 않고, 물로 씻고, 병원에도 오지 말라는 희한한 처방에 열광했다. 소문에 소문을 타고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렸다. 눈을 비비지 말고 잘 씻고 다른 사람과 접촉을 피하면, 사나흘 뒤 증상이 가라앉고 보름 정도 지나면 저절로 낫는 급성 결막염이다. 눈을 감염시키는 세균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은 공병우에게는 ‘누워서 떡 먹기’였다.

이때 그의 인생을 바꾼 귀한 인연이 찾아왔다.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이극로 선생이 공안과를 찾아온 것이다. 녹내장(綠內障)이다. 어두운 곳에서 오랫동안 한글을 연구하다 안압이 높아진 탓이다. 눈을 혹사한 배경을 묻다가 이극로 선생에게서 처음 들은 한글은 운명적인 첫사랑처럼 다가왔다. 서른이 넘어 자신이 한글에 문맹이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은 공병우는 ‘벽창우’처럼 집요하게 한글 공부에 몰두했다.

마침내 그동안 갈고닦은 한글 실력을 선보일 기회가 왔다. 눈에 가시가 든 것처럼 아파 ‘가시눈’이라고도 부르는 눈병 ‘도라홈’(트라코마)이 유행하자, 공병우는 예방하는 간단한 방법을 쉬운 한글로 적어 나눠주었다. 내친김에 당시 일본어로 되어 있던 시력검사표도 한글로 만들었다. 한글 시력검사표를 처음 만든 사람도 공병우다. 자신이 일본어로 썼던 저서 ‘신소안과학’(新小眼科學)도 한글로 번역했다.

전문서적을 출간하는 작업은 뜻하지 않은 고비에 부딪혔다. 공병우의 원고를 인쇄하려고 조수 2명이 옮겨 적었는데, 글꼴이 서로 다른데다 급히 흘려 쓴 글씨를 인쇄소 직원들이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성제대 견습생 시절 연구실에서 썼던 영문 타자기가 생각나, 수소문해서 한글 타자기 두 대를 사들였다.

뜻밖에 한글 타자기는 원고를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1914년 나온 최초의 한글 타자기 ‘이원익 타자기’는 영어 타자기에 한글 활자만 붙인 것이다. 글쇠가 84개나 되는 데다 가로로 찍고 세로로 읽어야 했다. 1933년 나온 ‘송기주 타자기’는 글쇠 수가 절반으로 줄었지만, 여전히 손으로 쓰는 것보다 빠르지 않았다.

‘벽창우’ 공병우는 결코 빙 둘러 돌아갈 위인이 못 된다. 열 살 무렵 고향에서 처음 본 재봉틀이 기억났다. 한 땀 한 땀 누비던 바느질을 대신해 주는 기계다. 손수 한글 타자기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온갖 타자기를 인체 해부하듯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속도가 빠른 타자기 개발에 나섰다. 의학 전문서적으로 가득했던 그의 사무실과 서재는 기름때 묻은 부품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녔고, 경쾌한 타자 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톡탁거렸다.

빠른 속도가 생명인 타자기는 글쇠 가짓수가 적고 쉽게 두드릴 수 있어야 한다. 처음에 자음과 모음으로 된 두벌식 자판으로 개발했다가,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눈 세벌식 자판으로 제작했다. 네벌식 자판은 세벌식에 특수문자를 추가한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을까? 마침내 1949년 세벌식 한글 타자기가 첫선을 보였다.

이듬해 터진 한국전쟁에서 공병우 타자기는 유감없이 진가를 발휘했다. 수많은 문서를 빠르고 정확하게 작성해서 전달해야 하는 전시 상황에, 미군이 타자기를 권하면서 한국군에서 수요가 급증한 것이다. 특히 1953년 맺은 정전협정은 공병우 타자기의 진가를 증명한 결정적인 사건이다. 유엔군, 인민군, 중공군이 협정 내용을 각각 영어, 한글, 한자로 작성해 교환하는데, 공병우 타자기로 찍은 한글 문서가 제일 먼저 나왔다. 이들 문서에 마크 클라크 장군과 김일성은 펜으로, 펑더화이(팽덕회) 장군은 붓으로 서명했다.

하지만 정작 공병우 타자기의 주인공은 공안과에 들이닥친 인민군에 끌려갔다. 1946년 조선공산당 당원들이 위조지폐를 찍은 정판사(精版社) 사건 가담자가 ‘경찰에게 고문받아 눈이 멀었다’고 주장했는데, 고문이 아니라 당뇨 때문에 실명한 것이라고 진단서를 써줬기 때문이다. 졸지에 정치범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고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의사의 본능은 수용소에서도 숨길 수 없었다. 눈병이 있는 군인이나 수감자들을 진료해 주면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 초등학교 국어책을 타자기로 쳐주자, 인민공화국에 타자기 설계도를 바치면 살려 주겠다는 회유까지 받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공병우는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공병우가 죽을 뻔한 두 번째 사건이다. 첫 번째 사건은 1939년 조선총독부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고향의 본가에 ‘금일 공병우 사망’이라는 전보를 띄운 것이다. 일본식으로 쓰려는 호적에서 한글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다.

1960년대 들어 정부가 공문서를 한글 타자기로 작성하고 상업고등학교에서 타자 교육을 시작하며 한글 타자기 글자판 표준안을 제정하면서, 공병우의 활약은 한글 기계화로 넓어졌다. 한글 타자기도 정부가 표준으로 정한 네벌식에 맞서 세벌식을 주장하고, 컴퓨터용 한글코드도 완성형에 맞서 조합형을 고집했다. ‘벽창우’도 이런 ‘벽창우’가 없을 정도다. 한국일보는 1965년 ‘한국의 유아독존’이라는 연재기사로 공병우를 최현배, 이병도, 김구, 이승만과 함께 고집불통 10명 가운데 한 명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벽창우’의 관심은 한글 → 한글 타자기 → 컴퓨터 자판 → 문서작성 프로그램 → 한글 운동으로 넘어갔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박흥호, 이찬진, 강태진, 정내권 같은 젊은 프로그래머들과 어울리며 1988년 한글문화원을 설립해서, 아래아한글(ᄒᆞᆫ글) 개발을 지원하고 국어정보학회와 함께 ‘한글 살리기 운동’을 펼쳤다.

"한글 기계가 자꾸 나오면 한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겐 남을 돕는 일 중 가장 가치 있고 가장 큰 일이 한글의 과학화를 발전시키는 일이다". ‘벽창우’가 평생 꺾지 않은 고집이다. 세종대왕은 붓이나 연필로 쓰는 과학적인 한글을 창제하고, 공병우는 타자기와 컴퓨터로 쓰는 아름다운 한글을 다듬은 것이다.

‘시간은 곧 생명’이라며 ‘한글 기계화’에 매달린 그의 3단 논법을 들어 보자. ① 인간의 생명은 시간으로 제한되어 있다. ② 인간이 제한된 능력 이상으로 일을 하려면 기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③ 제한된 시간에 제한된 능력 이상으로 일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더 오래 산다는 것이다. 속도를 생명으로 여긴 공병우는 학교도 계속 월반하는 바람에 졸업장 한 장 없다. 타자기도 모양이 아니라 속도가 중요했다. 시간이 아까워 화장실에 갈 때 신문과 라디오와 커피까지 들고 가기도 했다.

성미 급한 공병우는 유서도 일찌감치 남겼다. “죽게 되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장례식이나 추도식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장기와 시체를 기증하되, 그렇지 못할 경우 24시간 이내에 화장하며, 죽은 지 한 달 뒤에 친척과 친지에게 알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남은 재산은 장애인, 특히 시각장애인의 복지를 위해 쓰라고 당부했다. 실제로 그의 각막은 둘째 아들 공영태 공안과 원장의 손을 거쳐 다른 환자의 눈에 이식됐다. ‘죽어서 땅 한 평을 차지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에 콩을 심는 게 낫다’던 그였다.

1995년 3월 공병우가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유언과 달리 불과 이틀 만에 신문에 부고가 실리자, 당시 PC통신 게시판은 며칠 동안 젊은 세대의 조의문으로 빽빽이 뒤덮였다. 한국 네티즌들이 디지털 공간에서 처음 지낸 사회장(社會葬)이라고나 할까? 빈소도 없고 장례식도 없고 무덤도 없지만, 전혀 쓸쓸하지 않은 그의 죽음은 디지털 공간에 영원히 남아 사람들의 기억 속에 계속 회자될 것이다. 돌아가신 지 30주기가 되는 올해, 공병우 박사를 ‘추모의 클라우드’에서 내려받아(다운로드) 새로운 기억으로 되새겨야(업로드 해야) 할 것이다.

 

故 공병우 박사 작고 30주기를 추모하며
2025년 3월 4일
허두영 한국과학언론인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