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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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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 정책과 사업 주도해 원전기술 강국 견인

원자력 기술자립 실현한 원자력계 대부/ 모방에서 혁신 이룬 기술프런티어 수장 한필순

원자력 정책과 사업 주도해 원전기술 강국 견인
    원자력 기술자립 실현한 원자력계 대부 / 한필순 / 모방에서 혁신 이룬 기술프런티어 수장

학력 :
    1953~1957-공군사관학교 졸업(레이더 정비 장교)
    1957~1960-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1962~1964-미국 일리노이대학 이학석사
    1964~1969-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리버사이드 이학박사(물리학)    
    경력 :
    1970~1982-국방과학연구소 레이저 및 야시장비 연구부장
    1982~199-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 한국핵연료주식회사 사장
    1987~1989-한국원자력학회 회장
    1994~1997-한국원자력연구소 연구위원
    1997~2001-대덕클럽 회장, (주)가이아 대표이사 회장
    2010~2013-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    
    포상:
    1991-프랑스 국가훈장 뢰종드뇌르
    2010-과학기술훈장 창조장

에너지 자립 없는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은 없다,
    우리나라 원자력 기술자립의 선도자, 한필순 박사의 신념은 늘 올곧았다.     한국형 원자로 개발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     그는 기술자립은 돈이 아닌 정신력으로 한다는 걸 깨닫고 몸으로 부딪쳐 반대를 이겨냈다. 
    원자력 정책과 사업을 주도해 우리나라를 원전기술 강국으로 이끈 원자력계 대부, 한필순.     한평생 한국의 원자력 기술자립을 위해 힘을 쏟은 그의 헌신 덕분에     우리는 세계 최고의 원자력기술을 보유할 수 있었다.

1933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한 한필순 박사는 
    북한에서 중학시절까지 살다가 한국전쟁 때 남하했다.     
    1951년 19세의 나이에 부산 육군훈련소 군의학교 의무반에서 근무하다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 그는 졸업 후 서울대 문리과대학에 편입해 물리학과 인연을 맺는다.
    이후 미국 일리노이대와 캘리포니아대 리버사이드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국방과학연구소(ADD)에서 연구원 생활을 시작한다.

한 박사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한국의 방위 산업을 
    일약 개발도상국 수준으로 발전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는 국방과학연구소 유도무기개발단장 등으로 재직하며 열악한 우리나라 국방과학기술 자립을 위해 군복, 수류탄, 방탄 헬멧을 직접 개발했다.    
    당시 청와대 비서관이었던 김광모 박사는 개발한 헬멧을 대통령 앞에서 망치로 두드려가며 기술의 우수성을 입증하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한 박사와 원자력의 인연은 그가 1982년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전신인 
    한국에너지연구소의 대덕공학센터 분소장에 임명되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정부는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연구소 명칭에서 ‘원자력’이란 단어를 삭제했고, 예산은 지금 한국원자력연구원 예산(2019년 5,400억 원)의 100분의 0.5인 30억 원에 불과했다. 연구원들의 사기는 바닥이었고 실적도 지지부진했다
    대덕공학센터 분소장 취임식(1984.3.16)

한 박사는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찾기 위해 심기일전했다. 
    강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연구소 분위기 쇄신에 나섰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비록 우리 기관이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여건에 처해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가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일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20만 평의 땅이 있고 300여 명의 고급 인력이 있고, 좋은 건물이 있지 않습니까. 희망을 품고 나갈 방향을 찾아봅시다.

열띤 토론 끝에 찾은 희망은 바로 ‘원전 기술 자립화’였다. 
    그는 핵연료의 국산화가 원자력 기술자립의 출발점이라고 여기고, 1983년부터 핵연료 국산화 사업계획을 세워 추진했다.     
    그의 목표는 준공된 월성 1호기 핵연료를 전량 국산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국산 중수형 핵연료 최초 출하사진(1984.8.29)
    묘책을 낸 건 한 박사였다. 
    그는 독일에 예산과 기간을 줄일 공동설계라는 독특한 방식을 제안, 소수의 정예요원만을 독일로 파견해 기술을 익혀오게 했다.
    한 박사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연구원들은 ‘우리의 핵연료’를 위해 열의를 다졌다.     
    그 결과 1987년에 중수로용, 1989년에 경수로용 핵연료 생산 공장을 세워 핵연료 국산화를 달성했고, 이후 모든 한국 원전에는 우리의 핵연료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한국의 기술력에 전 세계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의 도전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 박사는 발전소 건설의 핵심이 되는 ‘원자로계통 설계 국산화사업’을 추진했다.     
    1970~80년대, 국내에는 고리 1호기부터 울진 1·2호기까지 모두 9기의 원전이 운전 또는 건설 중에 있었다. 
    원전사업은 급증하는 국내 전력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미국, 캐나다, 프랑스의 원전업체들에게 건설과 운전을 일임하는 턴키방식으로 맡겨졌다.

원자로계통 설계 국산화라는 것은 각종 기기와 설비들을 우리가 제작하여 
    직접 관리·운영할 수 있게 시스템을 제작하는 것으로, 이는 곧 한국형 원자로 개발을 의미했다.
    난관은 우리가 단 한 번도 직접 원자로 계통 설계를 완성해 본 적이 없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배짱과 끈기로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사실 기술도, 사람도, 돈도 부족한 상태에서 연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노력밖에 방법이 없었다.

우선 그는 핵연료 국산화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과 영광 3, 4호기의 공동설계 계약을 맺었다. 
    최소한의 시간과 비용으로 원자로의 핵심기술을 이해하고 습득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었다.     
    1986년 12월 14일, 원자로 계통설계 요원 1진 44명이 미국 CE(컴버스천엔지니어링)사로 파견됐다. 44명의 요원들은 하나같이 비장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발전로사업부 해외파견 송별회사진(1986.12.12)
    그들에게 한 박사는 
    “한국형 경수로 탄생은 전적으로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으니 실패하면 아예 돌아올 생각을 말라”며 “기술독립을 하겠다는 정신으로 ‘만세삼창’을 힘차게 외치자”라고 제안했다.     
    만세삼창을 외치던 연구진들의 마음은 결연했다. 
    기술자립을 하지 못하면 미국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가 목소리에서 묻어났다.


    원자로 계통 설계 및 핵연료 설계기술 자립 기념비 제막사진(1996.3.25)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한 박사를 필두로 한 연구원들은 
    영광 3, 4호기의 원자로 계통 설계를 완료할 수 있었다. 
    
    1996년 원전이 준공되었을 때 한국은 1,000MW급 가압경수로의 국산화율을 95%까지 달성하며 기술자립에 성공했고, 이들의 노력과 헌신으로 우리는 ‘한국 표준형 원자로’를 가지게 됐다. 
    이 성과로 한국은 일약 원자력기술 강국으로 떠올랐고, 한 박사는 최고의 원자력 전문가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됐다.

한 박사는 학문적으로도 원자력 분야에 중요한 성과를 남겼다. 
    바로 연구용 원자로인 ‘하나로’를 개발해 원자력 기술의 선도적 연구를 가능하게 한 점이다. 
    
    그는 한국의 원자력 기술이 날로 높아짐에 따라 
    고출력의 새로운 연구용 원자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연구용 원자로의 국산화 개발계획을 수립했다. 
    그의 의지에 따라 1995년 ‘하나로’가 만들어졌고, 
    이는 한국의 원자력기술의 우수성을 상징하는 성과로 여겨지고 있다.
    (위)다목적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 기공식사진(1989.3.25), (아래)준공된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 사진

이런 그의 성취를 기리기 위해 한국 정부는 사후에 그를     대전국립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에 안장했고,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의 명예도 헌정했다.     
    군인이라기보다 연구자로서 국방 과학기술과 원자력 기술자립에 심혈을 기울였던 과학자, 한필순. 외국의 원자로를 그대로 모방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신형 원자로를 설계하는 혁신을 이뤄낸 그는 기술프런티어 수장으로 우리 모두에게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