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로운 과학기술인 알리기④-과학기술기반구축 : 한국 과학기술의 기틀을 닦다]
안동혁, 김동일, 최형섭, 김재근, 한만춘 등 과학계 지도자로 활약
해방 이전 일제는 조선인 고급 과학기술 인력의 배출을 억제했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에는 과학기술자가 절대 부족 상태였다. 과학기술분야에서 대학을 졸업한 인재는 300여명, 조선인 박사학위 소지자는 12명이 전부였다.
해방과 함께 맥아더 장군은 '일본이 물러간 기관은 조선인들이 접수해 질서를 잡으라'는 전단지를 뿌렸는데, 몇 안 되는 과학기술인들이 주인이 없어진 연구소를 접수하는 주역으로 활동해야 했고, 비슷한 역할을 학계에서도 해야 했다. 그러나 국가의 과학기술 지원시스템이 부재한 탓에 도대체 연구를 수행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곧이어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많은 교수진이 사망하고 비교적 유능한 과학자들이 월북하며 상황은 더 어려워졌다.
그러나 당시 과학기술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과학기술 연구개발의 기틀과 부국을 위한 산업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해방직후 우리나라 과학 문화·행정·교육·연구의 씨앗을 심고 산학협력의 물꼬를 튼 과학기술인들을 만나본다.
한국 화학공학계의 대표적 지도자 ‘안동혁’…“다양한 분야에 관심 가진 천생 과학자”
안동혁(1907~2004) 박사는 1907년 서울 왕십리에서 정미업을 하던 아버지 안기종의 9남매 가운데 3남으로 태어났다. 11세 어린 나이로 휘문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경성고등공업학교를 거쳐 1929년 일본 규슈제국대학 응용화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경성고등공업학교 교사로 부임했으나 1933년 중앙시험소(현 국립공업시험원의 전신)에서 근무하다 해방되자 중앙공업 연구소로 옮겼으며, 해방 직후 상공부 장관(1953~1954)을 맡기도 했다. 평생 화학자로, 또 화학공학자로 활약하며 수많은 제자를 기른 그는 1958년부터 1976년까지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교수를 지냈다.
안동혁 박사의 업적은 크게 4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유지(油脂) 분야에서의 연구 성과다. 어린 시절 '비누는 기름과 양잿물을 끓여서 만든다'는 소리를 듣고 실제로 집에서 실험해보다가 어머니에게 자주 야단을 맞았다는 그는 결국 유지 분야를 전공, 대학졸업논문으로 '암모니아 비누에 관한 연구'를 제출했다. 이후 중앙시험소에서도 ‘비누제조법’, ‘수지추출방법’, ‘염화 고무제조법’ 등 여섯 가지의 특허를 냈다.
둘째는 일제시대 말기, 황무지였던 식민지 조선에서 과학대중화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그보다 경성고등공업학교 10년 선배였던 김용관의 권유로 과학대중화운동에 참가한 안동혁 박사는 '멘델레프 탄생 100년 잡감' 등 과학을 소재로 여러 차례 대중강연을 진행했다. 또 '조선 공업계의 전망', '현하 조선에서 과학지식을 보급시킬 묘안', '최근 세계의 화학공업' 등의 제목으로 과학조선 등에 기고를 썼다.
셋째는 해방 후 행정가로서 과학기술 여러 분야에서 큰 몫을 담당했다. 상공부 장관을 맡은 안동혁 박사는 한국 산업의 건설을 위해 해결해야 할 3가지로 '자금(Fund)', '에너지와 연료(Force)', '비료(Fetilizer)' 등을 꼽고 이를 위해 '3F 산업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유엔과 미국 등의 지원을 받아 화력발전소 3개를 건설을 추진하고, 충주비료 등 주요 산업 시설의 건설을 계획했다. 그의 3F정책에 따라 설계된 주요 기간산업은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경제개발의 토대가 되었다.
넷째는 화학공학계의 대표적 지도자로서 활동한 것이다. 안동혁 박사는 해방 직후 중앙시험소 및 경성공업전문학교 등의 일제강점기 과학기술기관을 접수해 재편했으며, 과학기술자들을 조직하여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대한화학회, 대한요업총협회 같은 단체들의 창설에 기여했다.
산학협동의 선구자 ‘김동일’…“레이온 국산화의 장본인”
김동일(1908~1998) 박사는 1908년 평안남도의 작은 마을에서 농사를 짓던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의 각별한 교육열에 힘입어 어릴 때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고, 1918년 사립 봉의학교를 거쳐 1925년 평양공립고등보통학교를 마친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29년 사가고등학교, 1933년 동경제국대학 공학부 응용화학과를 졸업했다. 그 뒤 1952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김동일 박사는 한국 최초의 동경제국대학 응용화학과 출신이었으나 한국인 차별로 인해 1년여 무보수 조교 생활을 했다. 이후 1934년 이와키 주식회사에 들어가 동양에서 처음으로 초산섬유소와 피막을 사용, 안전유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새로운 연구와 공정개발로 두각을 나타내던 그는 5년 후 평양에서 인견사를 생산하는 가네보화학공업 주식회사로 자리를 옮겼고, 여기서 삼작산 섬유소를 원료로 인견사를 만드는 새로운 제조법을 개발해냈다.
1942년 김동일 박사는 민족 자본으로 설립된 경성방직의 영등포공장장으로 귀국했고, 다시 공정 개선 및 경영의 합리화를 도모해 생산성을 일본계 방직회사보다 높였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초대 학장이 되어 우리나라 공학 교육의 기반을 확충하고 국대안(國大案) 반대와 학업 분위기 쇄신, 그리고 좌익 타도 등 여러 가지 현안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당시 교수진 확보가 어려웠던 상황에서 학장의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산·알칼리, 인조비료, 유리공업, 화약, 화학공업개론 등의 교과목을 전공교수가 영입될 때까지 강의를 맡아했다.
1954년 미국 미네소타대학 교환교수 생활을 하면서 학문 연구에 열중하였고 1954년에는 대한민국학술원 초대 회원이 됐다. 1959년에는 한국원자력원의 초대 상임위원에 임명되어 원자력학술회의를 주도하고 한국과학기술진흥협회를 조직해 사무총장을 역임하는 등 원자력 발전에도 힘을 쏟았다.
특히 ‘과학기술 혁신이 곧 국가 발전’이라는 명제 아래 1966년 9월 과학기술 관련단체를 통폐합한 후 전국과학기술자대회를 개최, 한국기술단체총연합회를 창설했다. '과학기술진흥법' 제정, 과학기술 전담부서 설치, '과학기술인의 신조' 제정, 한국과학기술회관 건립과 원로과학기술자문단 창설 등 우리 나라 과학기술 진흥 등에 힘쓴 결과 198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970년에는 사재를 출연해 한국석유산업개발센터를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한 이래 국가적으로 절실했던 석유 탐사와 개발 연구에 몰두했다.
한국 과학기술 행정의 아버지 ‘최형섭’…“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로 산업 발전 이끌어”
최형섭(1920~2004) 박사는 1920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으나 여러 지방으로 전근을 다닌 부친을 따라 초등학교는 충주에서, 중학교는 신의주중학교와 대전중학교를 다녔다. 어린 시절 가정형편이 부유해서 초등학교 때 일본의 어린이 과학잡지를 구독하고 중학교 때는 집 뒤 창고에 ‘이화학 실험실’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1994년 일본 와세다대학 채광야금과를 졸업, 해방과 함께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전임강사를 거쳐 해사대학 교수가 되었으나 1년 만에 그만두고 1948년 10월부터 2년 동안 국산 자동차회사 기술 고문으로 일하던 중 한국전쟁을 맞았다. 전쟁 기간 최형섭 박사는 경남 사천비행장에서 공군 항공수리창장(소령)으로 군복무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1955년 노트르담대학교에서 공학 석사학위를, 1958년 미네소타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당시 노트르담대학교에서 그를 가르치던 교수가 여기서 2년만 더 고생하면 지금까지 연구한 것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는데 왜 분야를 옮기려 하느냐고 묻자 그는 조국 경제 발전을 위해 더 필요한 연구 분야를 해야 한다며 학교를 옮겼다고 한다.
금속 분야 박사학위에 일본어와 영어를 구사하는 최형섭 박사는 당시로선 매우 드문 인재였으므로 귀국과 함께 여러 곳의 러브콜을 받게 된다. 그는 1959년 국산자동차주식회사 부사장으로 일하며 국내 최초로 소형자동차 제작에 대한 구체적인 세부계획을 마련했고, 1961년 원자력연구소 1급 연구관이 되면서 다시 연구 활동을 재개했는데, 곧이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상공부 광무국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최형섭 박사는 광업제련공사, 대한중석 등의 기술개발을 도와주었고, 이를 계기로 금속연료종합연구소의 설립을 추진하게 됐다. 당시 최형섭 박사는 낮에는 소장을 맡고 있던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밤에는 금속연료종합연구소에서 후배들과 금속공학 분야 연구를 거듭했다고 한다.
귀국 이후 원자력연구소 소장, 과학기술연구소 소장, 과학기술처 장관 등 고속출세 가도를 달렸는데,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최형섭 박사는 명석한 두뇌와 대단한 열정, 끊임없는 노력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7년 6개월 재임하면서 그는 ‘과학기술 발전의 기반구축’, ‘산업기술의 전략적 개발’, ‘과학기술의 풍토조성’ 등 3가지를 목표로 삼았고 많은 성과를 얻었다고 평가된다.
연구자로서, 연구관리자로서, 또 과학기술 행정가로서 모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그는 후배들과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고 2004년 타계한 후에는 과학계 인사로는 두 번째로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그의 묘비에는 ‘학문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 ‘아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 ‘직위에 연연하지 말고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는 후배들을 향한 조언이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조선공학의 개척자 ‘김재근’…“조선공학 독학해 학생들 가르쳐”
김재근(1920~1999) 박사는 1920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부친 김동직과 모친 안리원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덕동보통학교와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1기생으로 입학, 1943년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그 뒤 인천에 있는 조선기계제작소에서 2년간 잠수함의 설계에 종사하면서 조선공학에 흥미를 갖게 되어 현대 조선공학의 교육과 연구, 나아가서 고대 조선사 연구에 일생을 바치게 되었다.
해방 후인 1946년 10월 해양대학교에서 조선공학과 관련된 강의를 맡게 된 그는 1947년 조선과를 창설해 1기생을 졸업시킨 후 1949년 서울대학교에 부임한 후 조선공학에 대한 선진적인 학과 시스템을 구축하고 선진 학문을 도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1953년 문교부에서 선발한 제1회 관비유학교수단 10명 중 한 명으로 뽑힌 그는 1954년 3월부터 1년간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방문연구원 자격으로 지냈다. 그곳에서 그는 기초설계 과목부터 대학원 강의까지 모조리 청강하면서 제대로 된 조선공학을 스스로 익히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조선공학의 모든 과목을 스스로 공부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또한 제자들의 취직을 위해 조선회사는 물론이고 해운이나 기계와 관련된 기업을 직접 찾아다니기도 했다.
1952년에 대한조선학회가 설립될 때 창립 이사가 되었고, 1960년 6월부터 1970년 10월까지 회장으로서 학회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또한, 제10회 정부간해사자문기구 기술회의(IMCO)에 서울대학교 또는 정부대표로 참석하여 조선공학 및 조선행정면에 있어서 우리 나라의 국제적인 지위와 토대 구축을 위해서 힘썼다.
1966년 4월 기술사(조선부문) 자격을 취득한 이후 세관감시선과 FRP 어선, 유공 작업선 등의 설계 및 감리를 담당하던 그는 1968년 서울대학교에서 ‘연안객선에 있어서 대형 구상선수가 조파저항 감소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실험적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40대 후반에야 제대로 된 자격과 학위를 받은 것은 후학 양성 및 제자들의 취직을 위해 돌아다니는 시간이 많아 정작 자신의 연구는 미루었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대 조선공학과에서 1985년 3월에 정년퇴임하기까지 37년간에 걸쳐 현대 조선공학의 이론과 설계 분야의 교육 및 연구에 정력을 기울였다. 잠수함의 설계를 시작으로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는 어선, 연안객선의 성능 향상을 위한 연구와 고속정의 설계에 진력하였다. 또한 1970년대 중반부터 거북선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하여 타계하기까지 조선시대의 각종 함선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여 거북선을 비롯한 조선 때 우리 나라 군선의 선형, 구조, 뛰어난 기동성, 막강한 화력에 이르기까지의 군사상 우월성 및 조선공학적 특성을 규명하고, 조선시대의 대일 통신사선의 구조와 통신사선으로서의 제특성을 밝혔다.
그 외에 신라·고려시대·조선 전기의 배에 대한 연구를 거듭하여 우리 나라의 고대 선박사를 완성한 업적은 매우 크다. 1966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88년 7월부터 4년간 학술원 부원장으로 재직했다.
전력산업 근대화의 선구자 '한만춘'…“우리나라 부강 위해 공업입국 강조”
한만춘(1921~1984) 박사는 1921년 서울시 종로구에서 민족독립운동에 진력한 애국지사 한기악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의 뜻을 이어 받아 한만춘 박사는 일제강점기 때 박해를 받으면서도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민족관이 투철했으며 청렴결백한 생활을 했다.
서울 매동보통학교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3년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전업의 발전과장·기획과장으로 근무했다. 당시 한국인으로 조선전업에 일하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였다.
해방 후 우리나라의 낙후된 전기전자 분야에 인재 양성의 시급함을 직시하게 된 그는 1948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모교인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공학과에서 조교수로 교육과 연구를 시작했고, 1955년부터는 연세대학교 이공대학 전기공학과 교수로 근무하면서 1952년 전북대학교 공과대학, 1958년 인하공과대학에서도 강의를 했다.
또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 국비 해외파견으로 영국 노팅검대학교에 유학, 1961년 원자로 제어분야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이는 우리나라 전기 및 제어공학 분야에서 최초의 공학박사다.
1961년 이후에는 연세대학교 교수로, 이공대학장·산업대학원장·산업기술연구소장 등을 지냈으며, 재직중 전기공학부문에 많은 저서를 남겨 오늘날의 연세대 공학 교육 기반을 갖추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산학협동에도 앞장서 학계 및 관계, 산업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에 봉사하고 기여한 공로가 크다. 국무총리실 평가교수로서 에너지와 전력 정책에 관해 자문한 것은 물론 동력자원부의 정책자문위원, 공업진흥청 표준심의회의 전기부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한만춘 박사는 자신보다는 항상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가짐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며, 생전에 그는 자원이 풍부하지 못한 우리나라가 부강하기 위해서는 산업발전만이 마지막 열쇠라며 공업입국에 대한 지론을 강하게 펼친 것으로 전해진다.
[사진출처]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홈페이지(http://kast.or.kr/HALL/)
[참고문헌 및 사이트]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홈페이지(http://kast.or.kr/HALL/)
- 인물과학사 – 한국의 과학자들 (박성래/책과 함께)
- 뉴턴의 무정한 세계 (정인경/돌베개)
- 위키백과-인물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