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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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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 최장수 여성장관으로 21세기 한국 환경정책의 기틀을 세우다

사전예방 기조 아래 수자원·대기·폐기물·환경산업 등 획기적 정책 수립·시행
과학기술계의 사회적 역할 강화, 과학기술 정책 대안 제시 및 추진

헌정 최장수 여성장관으로 21세기 한국 환경정책의 기틀을 세우다 [김명자]
사전예방 기조 아래 수자원·대기·폐기물·환경산업 등 획기적 정책 수립·시행/
과학기술계의 사회적 역할 강화, 과학기술 정책 대안 제시 및 추진학력-
1962~1966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화학과 졸업,1967~1971 미국 버지니아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Ph.D.
경력-
1974~1999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화학·과학사: 이과대학장), 1999~2003 환경부 장관 , 2004~2008 17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국방위원회), 2003~04/2008~16 명지대 석좌교수, KAIST 초빙특훈교수, 2017~2020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2018~현재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AIIB) 국제자문위원 (IAP), 2020~현재  (사)서울국제포럼 회장
포상-
1994 과학기술상 진흥상 (대통령상), 2002 닮고 싶고 되고 싶은 과학기술인상 (한국과학문화재단), 2004 청조근정훈장 (대통령상), 2015 과학기술훈장 창조장 (대통령상), 2015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서울대학교), 2020 삼성행복대상 여성 선도상 (삼성생명공익재단)
“모든 성취는 저만의 능력이 아니라 주위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음덕(蔭德)을 입은 것이지요. ‘장관의 장수비결이 무엇이냐’는 인터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덕을 많이 입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21세기 한국 환경정책의 선진적 기틀을 짜고 실천에 옮겼다는 평가를 받는 김명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명예회장은 과학기술, 환경, 여성 정책 등에서 지속가능발전 개념 도입과 전향적인 해법을 제시한 비전의 리더이자 활동가다. 숙명여자대학교 교수에서 시작해 명지대 석좌교수, 카이스트 초빙특훈교수 등을 지냈고, 환경부 장관, 국회의원(비례대표), 한국과총 회장 등의 중책을 수행하며 여성 리더가 극히 소수인 열악한 여건에서 학계·행정부·입법부·NGO 모든 부문에 걸쳐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겼다. 현재도 융합적 가치에 기반한 리더십으로 30여개 봉사직에서 그를 응원하는 많은 이들과 함께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1944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 회장은 문과 소질이었으나 이과로 진로를 택하게 된다. 미국 예일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있던 부친이 이공계가 유망할 것이라고 권유한 것이 계기였다. 당시 미국은 소련의 최초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발사로 충격 속에서 과학기술 교육혁명이 붐을 타던 때였다. 그 영향권에서 태평양 건너 한국의 한 여학생이 과학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었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버지니아대학으로 유학을 간 그는 4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이 교과과정 혁신의 일환으로 대학원 석박사 통합 트랙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귀국 후 여성 과학자로서 일-가정 양립은 수퍼 우먼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74년 30세의 나이로 숙명여대 화학과 교수가 된 그는 아이들 셋에 며느리 역할에 하루를 25시간으로 살아도 모자랐다고 말한다. 70년대 실험실 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고, 이래저래 강의 전담 교수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자아(ego)를 찾기 위한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잠을 아껴 집에서도 할 수 있는 번역 작업이었다.1984년 서울대 대학원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이 개설되자, 그는 교수 신분으로 대학원생들과 나란히 과학사 세미나 수업에 참여했다. 그리하여  과학과 다른 분야와의 융합적 접근에 관심이 깊어졌고, 글쓰기도 번역에서 저술로 범위를 넓히게 되었다. 1984년에는 한국과학저술인협회가 시상하는 제1회 과학저술상도 받았다. “저는 실험연구에 몰두하는 스페셜리스트보다는 광범위한 융합적 접근에 더 끌렸습니다. ‘과학사’를 가르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과학기술의 역사는 방대한 문명사를 의미했고, 무한한 지적 세계로의 경이로운 탐험은 참으로 매력 있었습니다.”(사이언스타임즈, [과학기술계 원로와의 대화]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 2014. 4. 9)과학사로 다져진 폭 넓은 시야와 타고난 인문학적 소양은 그의 과학 저술 활동을 폭발적으로 신장시켰다. 그는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의 하나라고 생각해서 과학기술 관련 사회적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책을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1970년대 말부터 언론에 기고한 칼럼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1990년대 말에는 KBS의 <과학 2001> 프로그램의 MC를 맡았고, 90년대 내내 KBS 객원해설위원을 맡았다. 이들 활동으로 1995년 대한민국과학기술상 진흥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1970년대 말부터 저·역서 <과학혁명의 구조>, <엔트로피>, <동서양의 과학전통과 환경운동>, <현대사회와 과학>, <과학기술의 세계>, <원자력 딜레마>, <원자력 트릴레마>(공저), <인터넷 바다에서 우리 아이 구하기>(편저), <사용후핵연료 딜레마>(공저), <현대인과 비타민>, <화장품의 세계>, <향장의 상식> 등 20여권을 출간했고, 2020년에는 <산업혁명으로 세계사를 읽다>와 <팬데믹과 문명>의 두 권이 동시에 우수과학도서로 선정되었다. 
90년대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시절,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회의 유일한 여성 위원을 역임하다가 그 인연으로 1999년 환경부 장관으로 발탁된다. 융복합적 시각과 감수성의 결합은 그로 하여금 과학기술과 환경 정책 추진에서 ‘합리성과 감성’의 리더십을 발휘하게 했다. 섬세함과 치밀함으로 신중하게 결정하고, 일단 결정된 뒤에는 차질 없이 밀고 나가는 추진력으로 21세기 한국 환경정책의 기틀을 세운 그는 ‘국민의 정부’ 최장수 장관, 헌정 최장수 장관의 영예를 안았다.장관 재임 중 낙동강물관리종합대책을 비롯해 3년간의 진통 끝에 통과된 3대강 특별법, 천연가스버스 보급,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 경제-환경 상생을 위한 에코-2 프로젝트, 수도권대기질개선 특별대책, 차세대 핵심 환경기술개발사업, 한중일 3국 환경장관 연례회의, 2002년 환경 월드컵 개최 등 굵직한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 결과 환경부는 법적 근거에 의한 정부부처업무평가에서 제1회, 2회 연속 최우수부처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환경정책 기조는 ‘사전예방’이이었고, 과학과 사회의 융복합적 접근에 의한 설득 논리로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장관직을 마친 이듬해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국회  국방위원회 간사를 맡고, 여성 최초로 국회윤리특별위원장도 지냈다. 여성이 드문 국방 분야에서 군인복지기본법 제정과 국방 연구개발 활성화에 기여하고, 병영문화개선위원장으로 일했다. 외교안보 분야에서 아시아정당국제회의 공동조직위원장, 한일의원연맹 고문 등으로 활동했다.여성으로서 과학자이자 정치인이자 학자로서 김 회장은 여성의 사회 참여와 지위 향상에도 앞장섰다. 일-가정 양립의 고뇌를 체험한 그는 여성 과학기술인 육성과 지원을 위한 맞춤형 정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2012년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소통과 융합, 과학외교’를 슬로건으로 포럼, 워크숍, 세미나, 국내외 협력 프로그램을 펼쳤고, 다른 부문과의 협력의 공로로 한국여기자협회 등 여러 기관으로부터 감사패도 받았다.
최근 들어 국내외 여러 분야에서 여성 인재가 약진하고 있다. 2020년도 노벨 화학상 수상자는 두 명이 다 여성 과학자였고 노밸 물리학상도 여성 과학자가 받았다. 그러나 한국의 과학기술 여성 인력의 활용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 교육에 장기간 투자하고서도 사장시키는 현실을 타개할 때 국가 경쟁력 강화의 기회가 열릴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의 동반자 관계 정립은 인력이 국가의 발전에 필수인 한국으로서는 더욱 중요한 국가적 과제이고, 과학기술 혁신 생태계 조성에도 기여할 것입니다.”(사이언스타임즈, [과학기술계 원로와의 대화]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 2014.04.08.)김 회장은 과총 50년 역사상 최초로 여성 과학자가 수장으로 선출되는 기록을 세워 언론으로부터 또다시 유리 천정을 깼다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조직 문화 개선을 비롯해 과총의 위상 강화, 국민 눈높이의 과학기술 소통 등 과총의 재도약은 그의 미션이었다. 특히 역점을 둔 것은 ‘통합과 소통’의 가치 실현이었다. ‘우리 함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과학기술계가 함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을 수렴했고, 공통의 비전으로 뭉칠 때 과학기술의 시대적 소명을 다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실천에 옮기는데 앞장섰다. 김 회장이 새롭게 추진한 프로젝트는 3대 기초분야 학술비전 로드맵, 기초원천연구 중장기 로드맵, 차세대 참여의 YPF, 4차 산업혁명 핵심 분야 전문가회의와 포럼 등 300여 회의 토론의 장을 비롯해 신축 과학기술회관 사이언스플라자 착공, 대한민국과학기술연차대회 확대, 과학기술 ODA센터 신설 등 전방위적이었다. 과총의 역할 강화를 위해 과학기술의 사회적 책임과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하고, 미세먼지 국민포럼, 플라스틱 이슈포럼 시리즈 개최 등으로 과학기술 기반의 해법과 미래 지향적인 비전을 제시했다. “나는 큰 꿈을 갖고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주어진 자리에서 매 순간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좌우명으로 성실하고 정직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는 김명자 명예회장. 그는 항상 ’내가 해야 할 바를 다 하고, 그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되새겨 평정심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 결실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도 과총 명예회장으로 과학기술계를 후원하고 있다. 기후위기로 인한 복합위기 시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경쟁력을 강화해 리더 국가가 되는데 기여해야 한다는 믿음은 그가 공직에 몸담은 이래 줄곧 지켜온 선공후사의 정신과 통한다. 그의 현재 프로젝트는 서울국제포럼 회장으로의 봉사이나, 또 어떤 미래를 펼치게 될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