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로운 과학기술인 알리기⑥-한국인의 삶을 변화시킨 연구]
"쓰레기통에서 과연 장미꽃이 피겠는가?"
1955년 10월 8일, 유엔한국재건위원회(UNKRA)에서 인도 정치가 벤가릴 메논(Vengalil Krishnan Krishna Menon)이 한 말이다. 한국을 돕기 위해 UN에서 파견한 특별조사단의 단장이었던 메논은 일주일 동안 한국을 방문한 후 당시 절망적인 한국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해방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국민 대부분이 굶주림과 질병에 허덕였다. 내세울만한 뚜렷한 자원조차 없었다. 국가 전체가 암울했던 그 때, '과학만이 대한민국을 살릴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
바로 대한민국 과학기술인들이다. 그들은 일제 식민지 시기와 전쟁을 통해 산산조각난 한국인의 삶에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아마 우리 후손들은 지금처럼 윤택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국보 육종학자 '우장춘', 채소종자 자급을 실현하다
우장춘(1898~1959) 박사는 1898년 일본 도쿄에서 아버지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히로시마에서 마치고, 1916년 동경제국대학실과(전문대학)에 들어가 1919년 졸업했다. 일본 호적에는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로 되어 있으나 영어 논문에는 항상 자신의 이름을 ‘Nagaharu U’로 표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조선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우 박사는 졸업과 동시에 일본 농림성 농업시험장에 취직했다. 퇴직할 때까지 18년간 육종연구에 몰두하였으며, 1935년에는 일본 도쿄제국대학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우장춘이 '종의 합성' 이론을 실험적으로 입증하여 세계 유전육종학의 발전에 기여한 것도 바로 이때다. 배추와 양배추의 교잡을 통해 이미 존재하는 유체를 인위적으로 만들고 그 과정을 유전학적으로 규명, 종은 달라도 같은 속의 식물을 교배하면 전혀 새로운 식물을 만들 수 있음을 밝혔다.
이는 현존하는 식물을 실험을 통해 합성한 최초 사례며, 이 과정에서 제시한 배추, 양배추, 유채의 게놈(염색체) 사이의 상호관계는 ‘우장춘의 트라이앵글(U's triangle)’이라 불린다. '우장춘' 하면 '씨 없는 수박'을 떠올리지만 이를 최초 개발한 과학자는 일본 교토대의 기하라 히토시 박사다. 하지만 씨 없는 수박보다 더 중요한, 씨 없는 수박을 만드는 기초 원리를 실험적으로 증명한 것이 바로 '종의 합성‘ 이론이라는 평가다.
해방을 맞은 대한민국은 ‘우장춘 박사 한국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우 박사의 귀국에 뜻을 모았다. 평소 인생의 절반은 어머니 나라에서, 나머지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살기를 소망한 우 박사는 1950년 3월에 귀국, 부산 동래에 있는 농업과학연구소 초대소장(1950~1953)을 맡았다.
그가 귀국할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에서 들여오던 각종 종자의 반입이 전면 중단된 상태였다. 특히 김치 등을 만드는 데 필요한 채소류는 당시 필수적인 식재료였기에 국민들은 절대 빈곤과 굶주림에 시달려야만 했다. 우 박사는 우량종자를 확보·개발에 전력을 다했다. 당시 최첨단 기술인 자가불화합성(self-incompatibility , 自家不和合性)을 활용, 우리 땅에서도 잘 자라고 우리 입맛에도 맞는 ‘한국 배추와 무’ 개발에 성공했다. 또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강원도 감자’와 겨울 추위를 견디는 ‘제주도 감귤’의 재배법도 확립하는 등 수박, 참외, 토마토 등 20여 품종에서 종자를 확보에도 힘썼다.
또 당시 야채 재배에 있어서 기생충 감염이 심했는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청정 재배를 시도하고 생산된 야채를 외국인에게 공급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씨앗조차 심을 수 없었던 황폐한 조국 땅에 종자 자급자족의 길을 열고, 전쟁 이후 극심한 식량난을 해결하는 결정적 기여를 한 과학자가 바로 우장춘 박사였다.
우 박사는 자신의 연구뿐 아니라 원예육종학 전문가들을 육성하는 데에도 힘썼다. 1958년 종자개량 및 육종연구를 담당할 원예시험장(현재의 원예연구소)를 창설, 제자들을 양성해 한국 농학의 뿌리를 견고히 다졌다. 우 박사의 지도 아래 우수한 젊은이들이 최신 유전육종과 종자개량에 대해 배우며 학문적 기초를 다졌으며, 국가연구소와 민간종묘회사에 진출해 우리나라 원예학과 육종기술이 급속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석주명(1908~1950)은 1908년 평양 이문리에서 태어나,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하고, 1929년 일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졸업했다. 재학 당시 일본 곤충학회 회장을 지낸 오카지마의 총애 속에 곤충연구에 눈을 뜬 석주명은 1931년 자신의 모교인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산 나비에 대한 분류학 연구에 몰두했다.
석주명은 20여 년 간 나비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무려 75만 개체에 이르는 표본을 조사하고 이를 통계적으로 처리함으로써 기존의 잘못된 연구들을 바로잡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송도고등보통학교 박물관은 그의 나비표본으로 가득 찼고, 이내 개성의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석주명이 나비연구를 시작하던 1930년대 초는 외국 나비연구자들은 한국산 나비의 몇몇 개체만을 채집, 관찰하여 조금이라도 다른 형태가 발견되면 곧 새로운 학명을 명명했던 시기였다. 때문에 당시 보고된 한국산 나비의 수만 무려 844종에 달했다. 1940년 석주명은 자신의 저서 ‘조선산 나비 총목록'을 통해 잘못된 나비 분류를 바로잡고자 했다. 변이 범위에 포함된 기존 학명들을 동종이명(同種異名)으로 판명하고 한국산 나비를 248 종으로 정정했다.
우리말과 역사에 대한 열의와 지식이 남달랐던 석주명은 일본말로 된 나비에게 우리말 이름을 붙여주었다. 해방이후 그가 직접 만들거나 정리한 한국산 나비 248 종의 우리말 이름은 1947년 조선생물학회를 통해 최종 확정되었다. 각시멧노랑나비, 수풀알락팔랑나비, 유리창나비나리 등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나비 이름의 대부분이 석주명이 지은 것이다. 고등보통학교 박물교사인 석주명이 일본 제국대학 교수 등 저명한 학자들의 잘못된 연구를 지적하고 바로잡음으로써 식민지시기에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크게 높인 것이다.
석주명은 독특한 과학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주 “생물학은 다른 과학 분야와 달리 향토색이 짙어 ‘한국학적 생물학’이 가능하다”고 했다. 때문에 석주명은 자신의 연구대상을 철저하게 ‘한국’의 나비로 한정했다. 그는 한국의 생물을 대상으로 한국인 연구자가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론을 사용하여 한국의 생물·생물상의 독특한 모습을 밝히는 것이 한국학적 생물학(‘조선적 생물학’)이라고 여겼다. 스스로를 ‘조선적 생물학자’라고 부른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왕조실록이나 개인 문집 등 조선의 고전에서 나비와 관련된 기사나 인물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등 자신의 나비연구를 한국학과 연결 짓고자 하였다. 그는 1930년대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 추진되었던 ‘조선학 운동’에도 큰 뜻을 내비쳤고,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생물학 연구도 그 흐름에 놓고자 했다. 석주명은 자신의 ‘조선적 생물학’을 국학의 영역에 둠으로써 자신의 연구에 민족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었다.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인술(仁術)로 사랑을 베풀다
장기려 박사(1911~1995)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아버지 장운섭과 어머니 최윤경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일본 나고야대학에서 의학박사를 취득했다. 이후 평양 연합기독(기홀) 병원 외과 과장으로 지내며, 돈이 없어 평생 의사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가난한 환자들을 틈틈이 돌보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장 박사는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1950년대 말 당시 우리나라 간장외과 분야는 전혀 손을 댈 수 없었던 미개척지였다. 대다수 간 질환 환자들은 누렇게 뜬 얼굴을 하고 배에 물이 차는 고통 속에서 죽는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부산·경남지역에는 낙동강 민물고기 섭취로 인한 간디스토마를 비롯해 간 질환으로 고통 받는 환자도 많아 당시 장 박사의 고민도 깊어져만 갔다.
전쟁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환자들은 점점 늘어났다. 환자들의 아픔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장 박사는 직접 천막을 치고 병원을 세워 무료로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가 초대원장(1951~1976)을 지낸 부산 복음병원(지금의 고신의료원)이다. 본격적으로 인술(仁術)을 펼치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하루에 100명이 넘는 환자들이 몰려왔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촛불에 의지한 채 응급 수술도 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이후 장 박사는 가난한 환자들의 병원비 부담을 줄여 모두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고자 1968년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 의료 보험조합을 창설하였다. 이는 우리 전 국민이 누리고 있는 건강보험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장 박사는 1943년 우리나라 최초로 간암 환자의 간암 덩어리를 분리하였고, 1959년에는 간 대량절제술에 성공했다. 그의 간 혈관과 미세구조 등에 대한 연구는 간 수술 시 출혈에 대한 공포를 없애 많은 간질환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장 박사는 서울대·부산대·가톨릭의과대·부산복음간호전문대학에서 의료 인재 양성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76년 복음병원에서 은퇴한 후에도 그의 ‘인술로 베푸는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부산 동구 수정동에 청십자병원을 설립하여 무료진료를 하는 등 여러 사회봉사활동을 계속하며 ‘은퇴 없는 일생’을 살았다. 장 박사는 그의 일생을 두고 펼친 공적을 인정받아 1979년 8월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한국 임학의 대부 ‘현신규’…“산림의 성쇠가 국력의 성쇠와 비례한다”
현신규 박사는 1911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아버지 현도철과 어머니 이동일 사이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1933년 수원 고등농림학교, 1936년 일본 구주제국대학 임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해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에서 취직했다. 그 누구보다 임학에 대해 체계적인 학습을 받은 현 박사는 해방 직후 수원 농림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1946년부터 1977년까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수로 지냈다.
그는 한국전쟁으로 연구가 더 이상 어려워지자 1951년부터 2년간 미국으로 건너가 임목육종학 연구 활동을 이어나가기도 했는데, 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꼽히는 ‘ 리기테다 소나무’도 바로 이때 개발되었다.
일제 때 일본인 학자에 의해 도입된 리기다소나무는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고 추위에 강하지만 재질이 좋지 않고 생장이 늦었다. 반면 미국 남부에서 자라는 테다소나무는 이와 정반대의 성질을 지녔다. 이러한 점에 주목한 현 박사는 두 수종을 교잡 육종하여 ‘리기테다 소나무’를 탄생시켰다. ‘리기테다 소나무’는 ‘아빠’ ‘엄마’의 좋은 점만 물려받은 셈. 그가 대량으로 인공 교배하여 널리 보급한 '리기테다 소나무'는 국제식량농업기구에서 탁월한 육종성과로 인정받고, 미국의회에서도 이를 ‘한국의 기적의 소나무’라 불렀다. 현 박사가 전 세계적으로 탁월한 과학적 업적을 달성하고, 우리나라 육종학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놓는 초석을 마련한 것이다.
2년간의 미국 연구 활동을 통해 선진적인 임목육종학을 접하고 돌아온 현신규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내에 임목육종학연구소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 한국 임학계의 교육과 연구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953년 현 박사는 우리나라에 필요한 목재자원을 서둘러 확보하기 위해, 생장이 빠른 이탈리아포플러 330종을 들여와 국내 적합시험을 실시, 보급했다. 당시 한국일보가 1964년부터 ‘포플러 1억 그루 심기 운동’을 뒷받침했으며, 이 결과 1986년 현 박사가 눈을 감을 때까지 전국에는 2억9000만 그루의 포플러 나무가 심어졌다.
특히 현 박사는 산에서도 잘 자라는 포플러 수종 개발에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은백양과 수원사시나무를 교배하여 경사진 땅에서 잘 자라는 은수원사시나무가 개발되었다. 은수원사시나무는 짙은 그늘을 만들고 오염에 견디는 힘이 강하고 성장도 빨라 지금도 가로수로 많이 보급되고 있는 종이다. 1978년 박정희 대통령은 국토녹화에 크게 기여한 한 박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5·16민족상을 수여하고, 그의 성을 따 은수원사시나무를 '현사시'라 부르도록 했다.
그의 열정은 실험실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늘 ‘산림의 성쇠가 국력의 성쇠와 비례한다’, ‘산 푸르고 못사는 나라 없다’는 일념으로, 우수한 종자 개발 보급에 힘써 스스로 나무를 심고 숲을 가꾸는 데 앞장섰다. 한국전쟁 이후 헐벗은 우리의 국토가 푸르고 울창한 모습을 갖춘 데에는 현신규의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통일벼의 아버지 ‘허문회’, 보릿고개를 몰아내다
허문회 박사는 1927년 충북 청원에서 태어났으며 1954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학과를 졸업하고, 3년 후 동대학원 농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농촌진흥청의 전신인 농사원에서 근무(1957~1960)하던 허 박사가 벼 육종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959년 미국 Texas A&M 대학교에서 연수를 하면서 부터였다. 당시 벼 육종전문가였던 Henry Beachell 박사를 만나, 그곳에서 벼와 곡물의 육종에 관한 실질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다.
허문회 박사가 '통일벼'를 개발하기 전 우리나라는 늘 배가 고팠다. "쌀밥에 고깃국 실컷 먹고 죽어봤으면 한이 없겠다"고 하던 시절도 있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보리쌀과 밀쌀을 섞어먹는 등 쌀을 아끼기 위한 다양한 정책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국민들의 허기를 채우기엔 역부족이었다.
1960년 서울대 농과대학에 교수로 부임한 허 박사는 우리나라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밤낮으로 고민했다. 이후 1962년 필리핀의 국제미작연구소(IRIR)에서 근무, 이때부터 '통일벼' 육종 연구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다. 1971년 '통일벼' 개발을 완료, 품종화에 성공하였다. '통일벼'의 뛰어난 생산량에 힘입어 1972년 가을 쌀 생산량은 처음으로 3000만석을 돌파했다. 광복 전에는 남북한을 합해도 2500만석을 넘지 못했던 벼 생산량이다. 1976년에는 최초로 주곡 자급을 달성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녹색혁명이 완성되었다.
'통일벼'는 반왜성 인디카에 자포니카의 특성을 삼원교배 방식을 통하여 도입한 벼 품종인데, 키가 작으면서도 줄기가 두텁고 이삭이 크며, 잎이 곧게 뻗어 태양빛을 이용하는 효율이 높아 생산성이 좋다. 당시 재배되었던 자포니카 품종에 비해 30% 이상 많은 쌀을 생산할 수 있어 통일벼는 지금껏 개발된 벼 중에서 가장 높은 생산성을 낼 수 있는 이상적인 벼로 평가되고 있다.
허문회 박사는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던 과거 우리나라에 품종 육성을 통하여 주곡인 쌀 자급의 토대를 마련했다. 육종학의 기반이 취약했던 시기에 반왜성유전자를 이용하는 세계 선진 연구결과를 응용하고, 원연종간 삼원교잡이라는 창의적인 육종방법을 적용하여 ‘통일벼’ 육성에 힘썼다.
또한, 다양한 육종기술들의 이론적 배경과 육종 현장 적용 방안을 제시하여 우리의 식물육종 기술을 세계수준으로 높였으며, 농업 관련 학계와 연구기관 등에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우리 농업과학의 선진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는 세계가 인정하는 식물육종가이자 농업과학자로서 우리 민족의 과학적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설파했다.
한국의 파스퇴르 ‘이호왕’, 노벨상 수상자도 못한 유행성출열열 바이러스 분리 성공
이호왕 박사(1928~)는 1928년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기간에 널리 유행하던 전염병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내과 의사를 꿈꿨지만 그 이전에 미생물학을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1954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1957년에는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네소타대학 이학석사 학위를 취득, 서울대학교 의과대학(1961~1973) 교수를 역임하고, 1973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옮겼다.
이호왕 박사는 1969년 본격적으로 유행성출열열(학술명: 신증후출혈열)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휴전선 일대의 군인들 사이에 원인 불명의 출혈열 환자가 증가하고 이 병이 민간인에게도 옮겨가기 시작하면서 전 국민이 공포에 떨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유행성출혈열은 20여 년간 많은 연구자들이 연구를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의학계의 난제로 남아있었다. 병명조차 붙일 수 없어 ‘유행성’출혈열로 불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 박사는 이 문제의 해결을 자신의 연구목표로 삼았다.
이호왕 박사는 감염병을 옮기는 동물이 있다고 판단, 우리나라 들판에 살고 있는 등줄쥐를 잡아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이러스를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연구팀에서 유행성 출혈열 환자가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 박사는 굴하지 않고 연구를 밀어붙였다.
드디어 1976년 들쥐의 폐장에서 유행성 출혈열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쥐의 폐장을 새로운 연구대상으로 삼아 최신의 면역형광항체법을 이용하여 병원체를 찾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이 박사는 들쥐가 채집된 장소인 한탄강의 이름을 따 바이러스에 한탄바이러스(Hantaanvirus)라는 이름을 붙였다.
뒤이어 1980년 서울의 집쥐에서 한탄바이러스와는 다른 종인 서울바이러스를 발견했다. 그가 발견한 2종의 병원 바이러스가 유행성출혈열의 원형이었다. 이 박사는 1986년 국제학계에 새로운 바이러스의 속(genus)으로 한탄바이러스를 제안하고 공인받았다. 노벨의학상을 수상한 의학자 2명을 포함해 230명의 미국 연구진이 4000만 달러를 투자하고도 이루지 못한 것을 국제 과학기술계 최약소국 중 하나였던 한국 5명의 연구원이 20만 달러로 성공한 것이다.
당시 이호왕 박사는 미국 정부로부터 국립보건원 연구책임자 자리와 높은 연봉, 훌륭한 연구 환경을 제안 받았지만 "과학자에게도 조국애가 있다"며 제의를 거절했다. 이호왕 박사를 '한국의 파스퇴르'라고 부르는 데는 미생물학에서의 업적 뿐 아니라 깊은 애국심도 한몫했다.
이후 이호왕은 예방백신을 개발하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1985년에는 한탄바이러스를 동물조직에 연속적으로 배양시킨 결과 병원성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후 녹십자사와 공동연구로 백신 연구개발은 활기를 띠게 됐고, 마침내 1990년 세계 최초의 유행성출혈열 예방백신 제조허가가 보건사회부로부터 나오고 한국 신약개발 1호가 탄생하였다.
이호왕 박사는 국제 신증후출혈열 및 한탄바이러스학회 초대회장 및 명예회장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