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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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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균학 발전에 헌신한 최초 여성 농학박사

1960년대 중반 세계적 과학저널 Nature에 우수 연구논문 발표
버섯 연구집단을 형성하고 학술저작 "한국산 버섯도감" 출간

 

한국 균학 발전에 헌신한 최초 여성 농학박사
故김삼순
1960년대 중반 세계적 과학저널 Nature에 우수 연구논문 발표
버섯 연구집단을 형성하고 학술저작 학력
1928~1933 일본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이과 졸업
1941~1943 일본 홋카이도제국대학 이학부 식물학과 이학사
1966 일본 규슈대학 농학부 농학박사

경력
1933~1938 진명/경기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1946~1948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1968~1975 서울여자대학 식품영양학과 교수
1972~1976 한국균학회 초대 및 2대회장
1976~2001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포상
1979 대한민국학술원상
1990 월남장
1995 자랑스런 경기인(경기여고동창회) “과학하는 여성이 많아야겠어요. 한 가정의 선생으로서 뿐만 아니라 여성이 과학에 관심을 가져야 나라가 발전하지요. 그리고 자연훼손, 생태계를 파괴하는 문제, 환경문제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해요. 대결경쟁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공생공영 사상에 입각해서 모든 문제를 풀어가야 합니다. 농약과 화학비료에 의해 지하의 미생물이 죽어버리는 것이 안타까워요. 자연의 순리, 자연에 순응하는 말하자면 자연섭리에 맞는 농업을 해야 합니다.” (과학과 기술, [원로와의 대담] 우리나라 여성 농학박사 1호 김삼순 박사 중, 1993.) 한국 균학 연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했던 한 사람. 그는 미래를 내다보는 선구안으로 우리나라 여성 최초의 농학박사가 됐으며, 국가와 국민을 위한 과학 연구를 위해 ‘실천적 과학자’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선구자이자 개척자였다. 1999년 구순의 나이에 위암 수술을 받고도 발효식품 개발에 매달렸던 그는 발효빵을 개발하기 위해 유명제과점의 회장을 직접 만나러 갈 정도로 학문에 진심이었던 과학자였다. 한국 균학 역사의 서두를 열 수 있는 단 한 사람, 그의 이름은 김삼순이다. 김삼순 박사는 1909년 전담 담양에서 3남 4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만석꾼 집안의 부농이자 한학자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받을 수 있었지만, 4년제 보통학교에 다니는 것이 허락된 교육의 범위였다. 부친은 딸이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것은 반대했다. 완강하던 부친을 설득한 건 당시 일본에서 유학중이었던 오빠였다. 여동생의 영특함을 알고 있었던 오빠는 부친을 설득했고, 마침내 그는 경성(현 서울)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그의 나이 16세 때였다. 광주를 거쳐 서울로 올라간 그는 경기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에 입학했다. 그가 목격한 서울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만한 것이었다. 발전된 서울의 모습은 여자이지만 과학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가 됐다. 
“서울에 오니 전기불이 찬란한데 전등이라는 것을 처음 보았고, 다음날 전차를 보고는 더 놀랐어요. 그때 이미 앞으로의 세상은 과학문명 시대일 것이고, 그래서 자연과학을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지요.”(과학과 기술, [원로와의 대담] 우리나라 여성 농학박사 1호 김삼순 박사 중, 1993.) 경기여고보를 20세에 졸업한 그는 바로 동경여자고등사범학교 입학을 준비했다. 정규생이 아닌 청강생으로 이과에 합격한 그는 우수한 학생들과 함께 하며 학문에 대한 열의와 야망을 키워 나갔다. 조선인이 일본인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결심으로 하루 4시간 이상 자지 않고 공부에 열중했다. 그 결과 청강생이었지만 우수한 성적을 받아 4년 수료의 선과생 자격을 얻어 졸업할 수 있었다. 이후 교원 의무 복무기한 2년을 채우기 위해 1933년부터 조선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과학에 대한 열정으로 1939년 다시 일본행을 택하게 된다. 그는 1941년 한국인 여성 최초로 제국대학 이학부에 입학했다. 홋카이도제국 대학 이학부에 지원해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한 그는 식물생리학교실에 들어가 곰팡이의 일종인 사상균을 주제로 연구를 수행했다. 이곳에서 곰팡이의 생리화학에 관해 2편의 우수한 논문을 쓰고 졸업했다. 졸업 후 균학을 배우기 위해 홋카이도제국대학 농학부 대학원 응용균학교실에 들어갔지만, 2차 세계대전이 확대되면서 다시 조선으로 귀국하고 만다. 해방 후 그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생물과 교수가 됐다. 그러나 박사 학위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었던 그는 교수 생활에 큰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교수가 되니 학위에 대한 열망만 더 커져갔다. 1948년 기회가 생겼으나 한국전쟁에 막혀 떠나지 못한 그는 끝끝내 13년만인 1961년 일본으로 다시 건너갔다. 그의 나이 53세였다. 김 박사는 홋카이도대학을 거쳐 규슈대학 농학부 도미타 키이치(富田義一) 교수의 생물물리연구실에서 연구생으로 활동했다. 그는 누룩곰팡이가 분비하는 탄수화물 분해효소인 다카아밀라제 A와 빛의 상호관계를 주제로 연구했다.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 학교 바로 옆에 방을 구해놓고 교문이 열리면 가장 먼저 들어갔다. 실험과 연구에만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시간이었다. 그 결과 세계적 과학저널 ‘네이처’에 2편의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다. 당시 한국 과학계를 통틀어 보더라도 드문 일이었다. 그는 이 논문들을 종합하여 1966년 “다카아밀라제 A의 광불활성화”라는 제목의 학위논문을 제출했고, 1966년 한국인 최초의 여성 농학박사가 될 수 있었다. 귀국한 그는 건국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1968년 서울여자대학 식품영양학과 초대 교수로 부임했다. 여성교육에 뜻을 품고 있었던 터라 고황경 초대 학장의 부름을 마다하지 않았다. 고 학장과 그는 여성이 공부하기 어려운 환경을 조금이라도 개선시키기 위해 손을 맞잡았다. 더불어 응용균학 연구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과학 연구를 위해 대학 부설 미생물연구소를 설립했고, 우리나라 농업의 부흥을 위해 세워졌던 농촌발전연구소를 맡아 이끌었다. 국가와 국민들을 위한 그의 균학 연구는 지속적인 연구비 수주를 바탕으로 발전을 거듭해 나갈 수 있었다. 한국에서 그가 첫 연구주제로 잡은 것은 바로 균의 일종이기도 한 ‘버섯’이었다. 국가와 국민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과학연구를 하고 싶었던 김 박사는 버섯이 농가소득과 식생활 개선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것으로 판단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표고와 양송이를 수출하고 있었으나 느타리버섯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일본에서 종균을 들여와 한국에 맞는 느타리버섯 인공재배법을 체계적으로 연구해 그 보급 재배의 기틀을 마련했다. 균학의 제도적 발전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1971년 9월 열린 국제균학협회를 보고 자극을 받은 그는 이듬해 한국균학회를 조직해 초대회장을 역임하며 한국 균학을 알리기 시작했다. 1973년에는 한국균학회를 국제균학협회에 가입시켰고, 같은 해 4월 한국균학회지 창간호를 발행하는 등 학회 발전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 학회 활동을 통해 버섯 분류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김 교수는 수백 종에 이르는 버섯에 대한 우리말 이름이 달라 교육과 연구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문제점을 발견하곤 대책 마련에 고심했다. 그는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말 버섯이름 통일안’의 제정을 주도했고, 나아가 장기간에 걸친 조사 연구를 통해 1990년 ‘한국산 버섯도감’을 출간해냈다. 82세의 나이에 후학 김양섭과 함께 펴낸 이 도감은 ‘우리나라 버섯연구 원전’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퇴임 후에는 고향으로 내려가 1978년 삼성농장과 취원응용미생물연구소를 세워 과학연구에 계속 몰두했다. 공부하고 연구하는 게 제일 재밌다며 남다른 열정을 보였던 그는 1988년 자비로 성지학술상을 제정해 우수한 균학자들에게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든 업적을 인정받아 1979년 대한민국학술원상, 1990년 월남장 등을 수상했다. “된장, 간장을 개발할 연구실 부지를 알아보라.”

위암으로 고통이 심할 때도 김삼순 박사의 연구 열정은 식지 않았다. 망백(望百, 91세)을 넘긴 학자의 죽음 앞에서 선후배들이 애통함을 감추지 못했던 건 그가 열악한 환경에서도 뛰어난 과학적 성취를 이뤄낸 선구적 여성과학자이자 솔선수범하는 열정적인 삶으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 나간 개척자였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교육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던 시기, 과학에 미쳐 외길 걷기를 선택한 김삼순 박사. 끝까지 현역이고자 했던 그의 뜨거운 삶은 한국과학사에 영원히 기억될 이정표로 후학들의 귀감이 되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