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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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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 교육과 연구로 나라 사랑을 실천하다 - ⑮ 故 김순경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⑮ 우리나라 화학 교육·연구의 기초를 다진 한국 화학계의 큰 스승 故 김순경 템플대학교 명예교수

‘군론’ 등으로 이론물리 및 화학분야 탁월한 학문적 업적 남겨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 창립으로 유학생 지원 등 한인 과학자 자부심 고취

매년 여름이면 한-미 과학기술 협력을 위한 대표적 교류 행사가 열린다. 8월 개최하는 학술대회 UKC(US-Korea Conference)는 재미 과학기술인들을 주축으로 매년 수백여 명의 양국 과학자가 참석해 최신 연구 동향을 공유하고 성과를 교류한다.
UKC의 성공 뒤에는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이하 KSEA)가 있다. 
1971년 유학생 출신 재미 한인 과학기술자 69명이 모여 창설한 KSEA는 미국에 한국 과학기술의 현황을 전하고 모국의 정책자문 등을 맡으며 양국 간의 통로가 되었다. 故 김순경 박사는 미국에서 화학자로서 수준 높은 연구를 수행하는 동시에 KSEA 설립에 큰 역할을 하며 한국 과학자사회의 조직화에 기여했다.

1920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김순경 박사는 함흥농업중학교를 다니던 무렵 화학에 흥미를 느꼈고, 화학을 계속 배우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경성공업전문학교로 진학해 응용화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김 박사의 학업에 대한 열의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일본인도 들어가기 어려웠던 오사카제국대학에 식민지 청년으로 유학을 가서 화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서른다섯에 떠난 미국 유학에서 예일 대학원 화학과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1년 9개월 만에 마치는 열정을 보여 주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김순경 박사의 연구 열정을 품기에는 많이 혼란스러웠다.
해방 직후의 연구 환경은 매우 미약했고, 정치사회적으로 불안정했다. 김순경 박사는 귀국 후 경성대학(구 경성제국대학) 화학과의 전임강사로 부임, 이태규 교수를 도와 서울대학교 화학과 창설을 주도했지만,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일명 ‘국대안’)으로 학내 갈등이 고조되자 1947년 학교를 사직하고 중앙공업연구소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태규 교수는 1948년 말, 미국 유타대학으로 떠나면서 국대안 파동 당시 사직했던 이들을 모두 복직시켰고, 이를 계기로 김순경 박사도 서울대 화학과로 돌아왔다. 
그러나 혼란은 계속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대 화학과 교원 상당수가 월북을 선택했고, 김순경 박사는 부산 전시연합대학에서 학생들의 교육을 책임졌다. 
그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양자화학, 물리화학, 열역학 등을 가르치며 후진 양성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피난 시절에도 그의 강의는 엄격하면서도 수준 높은 강의로 유명했다. 김 박사는 그가 맡은 모든 과목에 대해 ‘공부는 학생이 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고수하며 강의시간마다 날카로운 질문과 호된 질책으로 학생들로 하여금 열심히 공부하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또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학생들에게는 야간학교 과학 교사 아르바이트를 주선하고, 형편이 어려운 제자에게는 자신의 집에서 기거하도록 했던 자상한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후학들이 오늘날 화학계의 중진이 되도록 이끌었다.

김순경 박사의 제자들은 당시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6.25 직후이므로 학생들은 교과서를 구할 수 없었는데, 김 선생님은 1,200면이나 되는 Glasstone저 ‘Textbook of Physical Chemistry’를 챕터별로 나누어 아래 양복 뒷주머니에 넣고 오셔서 ‘오늘은 ‥에 관해 공부합시다’라고 챕터 제목을 말씀하시고는 책도 보지 않고 술술 강의하시곤 했다. 그런데 교과서의 챕터 순서를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선택해서 강의하시니 학생들은 기이하면서 종잡을 수 없었고 강의내용을 필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때 필기해 둔 내용이 훗날 필자가 교사가 되어 강의 준비할 때 대단히 유용했으며,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노트를 보관하고 있다.” -故 김시중 전 과학기술처 장관 -

힘들었던 시기, 그의 생활도 녹록지 않았다. 서울대 교수라 하더라도 다른 대학에서 
많은 시간의 강의를 맡아야 생활이 가능할 만큼 사정이 열악했다. 그래도 그의 교육을 향한 열의만큼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당시로써는 상상할 수 없었던 해외 학술지 구독을 성사시킨 것도 그였다. 선진국의 연구 동향 파악을 위해 해외 학술지 구독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여러 독지가를 찾아다니며 필요한 예산의 모금 활동을 시작했고 대통령의 환전 허가까지 받아내며 구독을 성사시켰다.

그는 후학 양성에 힘쓰는 한편, 여러 혼란으로 침체기에 놓인 대한화학회의 재건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김 박사는 대학화학회의 조직을 개편해 운영체제를 간사장 책임제로 개선하고 직접 초대 간사장직을 수행하면서 학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또 냉전체제 속에 러시아(구 소련)의 반대를 무릅쓰고 1963년 국제순수화학및응용화학연합회(IUPAC)의 입회 승인을 얻어내며 우리나라 화학계를 국제적인 반열에 올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매사에 완벽함을 추구하던 그는 좀 더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 1961년 미국 브라운대학교 화학과 방문교수로 부임한다. 당시 세계 유수의 학술기관에서 초빙할 만큼 그의 학술적 권위와 명성은 매우 높았다. 김 박사는 강전해질용액론, 수리물리학, 반대칭광학 현상, 
유체의 수송현상, 화학 반응속도론, 기체의 흡착이론, 일반적인 통계역학 및 이론화학 분야에서 72편의 논문과 4권의 저서 및 3권의 역서를 발표 또는 저술하는 학술적 업적을 이뤄냈다.

그중에서도 화학에 대해 물리학적 접근을 시도한 ‘군론(群論·group theory)’을 완성한 일은 그의 대표적 업적으로 남아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는 김 명예교수의 연구 업적을 기려 1999년 군론 연구를 집대성한 책을 발간했고, 한국연구재단은 2012년 한국 학술연구 100년을 분석한 보고서에서 김 박사의 연구 업적을 주요 성과로 꼽기도 했다.

미주 전역에 흩어져 있던 한국인 과학기술자 조직화의 선봉에도 그가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활동이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KSEA) 창설이다. 
1971년 창립된 KSEA 초대 회장으로 추대된 그는 발기인 대회에 모인 30~40대 젊은 과학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한인 과학자들은 서로 아는 지식을 모아 조국의 허다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려고 한다.” 약 3,000명의 회원이 활동하는 재외 한인 최대 과학자 조직인 KSEA가 결성된 순간이었다.

KSEA는 이후 한국 과학기술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재미동포 과학자들이 조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는 통로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초창기 가난했던 협회는 각종 학술대회, 한·미 공동연구 프로젝트, 차세대 과학기술자 지원 등 활동을 조금씩 넓혀나가며 영향력을 넓혀갔다. 협회 주도로 열리는 학술회의인 UKC는 매년 수백 명의 과학자가 참여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협회 활동을 하던 젊은 과학자와 유학생 일부는 귀국해 KIST와 포스텍 설립에 핵심 역할을 하기도 했다.

평생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학문에 정진했던 故 김순경 박사. 
그는 젊어서는 우리나라 화학 교육과 연구의 기초를 다졌고, 중년 이후부터는 미국을 무대로 평생 화학 연구에 정진하며, 수준 높은 업적을 남기는 데 삶을 바쳤다. 과학의 본질을 꿰뚫는 질문을 자주 했던 그의 혜안은 아직까지도 많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 또렷하게 기억되고 있다.

이에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고, 1961년 대한민국학술상, 1972년 국민훈장 동백장, 1996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평생 화학에 정진하여 세계가 인정한 학술 업적을 남긴 그는 2005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으며, 2017년엔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되며 예우를 약속받았다.

한 제자가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국가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충고를 부탁하자 그는, “무슨 일을 할 때든 언제나 우리 민족을 소중히 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평생 지녔던 마음이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드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다는 그의 바람은, 이제 후학들이 이뤄야 할 숙제가 됐다. 애국자로 평생을 살았던 그의 마음을 우리가 이어나가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