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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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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시기 '과학조선 건설'의 비전을 제시하다

4월을 과학주간으로 정하고 과학지식보급회를 만들어 대중적 과학운동 전개

고난의 시기 ‘과학조선 건설’의 비전을 제시하다 김용관 4월을 과학주간으로 정하고 과학지식보급회를 만들어 대중적 과학운동 전개 
학력-1913 관립공업전습소 도기과,1918 경성공업전문학교 요업과,1919 일본 도쿄고등공업학교 요업과 선과
경력-1924~1925, 1932~ 발명학회 전임이사,1928~1932 고려발명협회 이사,1933~1944  [과학조선] 발행인,1934~ 과학지식보급회 상무이사,1934~ 과학데이 행사 주도,1945~ 조선요업협회 부위원장,1956~1967 한국발명협회 상무이사, 부회장
포상-1959 발명의 날 수상(상공부),1965 발명협회장상,1967 발명상 공로상(상공부)

“한 개의 시험관은 전 세계를 뒤집는다. 과학의 승리자가 모든 것의 승리자다. 다 같이 손을 잡고 과학조선을 위해 분기하자.” 1934년 4월 19일, 빼앗긴 땅 경성의 하늘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암울했던 조선의 새로운 비전이 될 ‘과학조선’을 향한 외침이었다. 그 중심에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기술활동가였던 김용관 선생이 있었다.

그는 4월 19일을 과학데이로 지정하고, 대중들이 참여하는 과학행사를 대대적으로 펼쳤다. 대한민국 유사 이래 최초의 ‘과학의 날’이었다. 1934년 4월 19일 열린 ‘제1회 과학데이’ 행사에는 무려 8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과 탄압은 계속됐다. 많은 수의 사람이 모이는 행위가 민족운동으로 비춰진 것이다. 결국, 5회 만인 1937년 과학데이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김용관 선생은 해방 이후 발명단체 등에 참여하고 과학 강연에도 다시 나서며 과학의 날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앞장섰다. 그가 지핀 과학조선 건설의 불씨는 다른 사람들이 가세하고 주도하며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나갔다. 오늘날 대한민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과학조선 실현을 위해 고군분투한 선구적 과학기술 리더이자 고난의 시기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김용관 선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30년대 과학운동의 중심 역할을 한 김용관 선생은 1897년 3월 21일(음력) 서울 창신동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과학기술 교육기관이었던 관립공업전습소 도기과를 거쳐 1918년 경성공업전문학교를 1회로 졸업한 그는 당시 어두웠던 조국의 시대 상황에 대해 책임의식을 가진 청년으로 성장했다 . 무엇보다 그의 가슴을 두드린 건 과학이었다. 그는 경성공업전문학교 졸업 후 떠난 일본 유학에서 일본의 근대화의 뿌리가 과학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고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1919년 귀국한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취직했다. 그러나 과학기술 보급에 뜻이 있었던 그의 사회생활은 원만하지 않았다. 근대적 기술에 기반한 조선인 공업가 양성을 내세운 조선공예학원도 자금과 경험이 부족해 얼마 못가 문을 닫았다. 결국 그는 자신이 진짜 해야 할 일을 찾아 나섰다. 3.1운동으로 민족적 자강운동이 활기를 띄었던 그 해, 김용관 선생은 1세대 과학기술인으로서 사명감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민족의 과학기술 역량을 높이기 위한 거대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

마침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전투기와 화학무기의 위력이 아시아에도 전해지고 있던 참이었다. 이에 조선에서도 각종 기술의 발명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발명을 통해 과학기술인을 양성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동기생들을 비롯한 과학기술인들을 찾아다니며 발명학회 창립의 필요성을 알렸다. 그의 노력으로 발기인 41인이 모였고, 마침내 1924년 과학운동의 토대가 된 발명학회를 창립할 수 있었다 . 그러나 김용관 선생의 노력에도 학회 운영은 부진을 면치 못했고, 결국 문을 닫게 됐다.

그는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선 무엇보다 사회문화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이때부터 김용관 선생은 동아일보에 민족공업화 진흥 방안과 관련된 글을 틈나는 대로 연재하며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당시 그는 조선인들의 생활이 외국 상품에 지배당하고 있는 현실을 타개하고자 했다 .생활을 하면 할수록 외국자본만 부유해지는 반면 조선인들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그는 조선인이 직접 일상생활의 필수품을 자체 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발명이 그 유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노력으로 발명학회는 1932년 다시 문을 열었다.김용관 선생은 독자적으로 발명 진흥 운동을 꾸려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과학기술인들과 더불어 시인 주요한과 시조시인 이은상, 조선변호사협회장을 지냈던 이인, 독립신문 사장을 지낸 윤치호 등 사회 저명인사들을 새로이 영입했다. 이때 나온 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과학잡지 [과학조선]이다. 1933년 6월 창간호를 시작으로 1년간 발간됐던 이 과학잡지는 1934년 윤치호를 의장으로 조직한 과학지식보급회에 인계되어 1944년까지 발행되며 조선의 과학지식 보급화에 큰 획을 그었다. 김용관 선생은 과학운동을 통해 민족의 자립과 실력양성을 추구하던 ‘과학지식보급회’의 전무이사로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우리 조선은 과학이라 하면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어려운 학문적 이론처럼 생각하여 과학이 실사회와 거의 절연상태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과학의 황무지가 되었으니 이리하여 우리가 날마다 쓰고 접촉하는 외국의 과학 제품이 조수처럼 들어와서 우리의 주머닛돈을 자꾸 남에게 빼앗기고 있습니다. 나는 과학조선의 전도를 위하여 이 방면에 일하기 쉬지 아니할 것을 여러 동지들에게 호소합니다.”(김용관, 「과학지식 보급에 대하야」, [과학조선] 34년 6월호 중에서)

발명학회 재건과 과학잡지 발간에 성공한 김용관 선생은 과학지식과 사상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한 방안으로 대중 집회를 구상했다 . 그렇게 열린 ‘제1회 과학데이’는 일주일간 진행됐고, 수 천 명의 사람들이 운집하며 대성황을 이뤘다. 기념식, 강연회, 라디오 방송, 자동차 기행렬, 활동사진 상영, 과학 기관 견학, 발명품 전람회, 과학 상담, 좌담회 등으로 구성된 행사는 당시 조선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김용관 선생의 열망은 ‘과학조선의 건설’에 닿아 있었다. 그가 추진한 과학 운동의 가장 큰 가치는 과학기술을 민족 과제로 제시하고 그것의 진흥을 열성적으로 추진했다는 데 있었다. 그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과학조선을 이끌 인재들의 양성과 이화학연구소 설치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과학보급과 기술발명 등을 위한 인재와 시설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 그는 과학데이 이후 쏟아진 후원과 지지를 기반으로 ‘과학조선의 건설’이라는 목표를 향해 묵묵히 걸어 나갔다. 매회 꾸준히 발전하던 과학데이는 1937년 일제의 탄압으로 제지됐고 , 소규모 옥내 행사로 제한되었다. 그 이후 과학지식보급회와 발명학회는 급격히 위축됐다 . 이제 막 싹을 틔우려 한 과학대중화 움직임도 일제에 의해 차단되며 시들어갔다 . 그 이후 과학지식보급회와 발명학회는 급격히 위축됐다.
김용관 선생은 지방으로 내려가 교사를 하거나 다시 경성으로 돌아와 자영업에 종사했지만, 안정된 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그가 과학기술 진흥과 관련해 오랫동안 적절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데 있다. 김용관 선생이 받은 상은 모두 발명과 관련된 것들로 1959년 발명의 날 수상(상공부 ), 1965년 발명협회상, 1967년 발명상 공로상(상공부) 등이 있을 뿐이었다 . 사후에도 별다른 인정을 받지 못했던 그의 업적은 뒤늦게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정부는 그를 ‘2020 과학기술유공 ’로 선정하며 그의 과학조선 건설을 향한 열정과 노력을 기렸다. 한국 과학기술 설계의 대부, 김용관 선생. 그는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일찍 깨닫고, 빼앗긴 땅에서 과학대중화 활동을 벌인 선구적 과학기술 리더였다 . 척박한 토양에서 시작된 오늘날의 대한민국 과학문화의 역사는 그가 제시한 과학조선 건설의 청사진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래를 내다본 선구안으로 민족의 자긍심을 채워나간 김용관 선생 . 그가 그린 미래를, 이제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꿔 나가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