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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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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생명공학 발전의 기반을 구축하다

이성화당 생산공정 개발로 전분당산업 발전 선도
항결핵 항생제 원료의 국산화 성공으로 국민 보건에 기여

한국 생명공학 발전의 기반을 구축하다 [한문희] 이성화당 생산공정 개발로 전분당산업 발전 선도
항결핵 항생제 원료의 국산화 성공으로 국민 보건에 기여학력-1957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생물학 이학사, 1959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물학 이학석사, 1964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 대학원 생물학 이학박사
경력-
1974~1985 KIST 응용생화학연구실 실장, 생명공학연구부 부장, 1985~1990 KIST 부설 유전공학센터(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소장, 1992~1994 STEPI 연구기획관리단 전문위원/단장,
2000~2012 프로테오젠(주) 대표이사, 2008~현재  한국바이오벤처협회(현 한국바이오협회) 명예회장
포상-
1985 국민훈장 동백장, 1989 대통령 표창, 1997 대한민국 과학기술상 과학상,
“이 기술 됩니까?”(과학기술처 김용완 차관) “예, 됩니다.”(한문희 박사)
한 과학자의 단호한 대답에 당시 과학기술처 차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첨단기술 분야였지만, 국내에선 시도하지 않았던 유전공학의 가능성을 묻는 자리였다. 
1980년대 초 정부가 유전공학을 집중 육성한다는 소식에 많은 학자들은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성공 여부가 불확실한 연구라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한문희 박사는 유전공학이야말로 또 다른 가치를 창출해낼 수 있는 연구 분야임을 확신했다. 그는 이미 남과는 다른 눈으로 대한민국 생명공학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1934년 서울에서 태어난 한문희 박사의 어린 시절은 늘 자연과 함께였다. 방학 때마다 할아버지가 사시던 시골 고향에 내려가서 곤충이나 식물을 관찰하며 뛰노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자연스럽게 생물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후 진학한 중학교에서는 생물반 활동을 통해 호기심을 해결했다. 서울대 생물학과에 진학한 이유도 단순 관찰이 아닌 학문의 영역에서 “생명의 기본원리”를 공부해 보고 싶다는 열정 때문이었다.대학 4학년 때 최기철 교수님의 지도 아래 ‘조개의 호흡효소에 관한 온도의 영향’을 주제로 졸업논문을 쓴 그는 이때부터 효소 연구에 대한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학원에서 관련 공부를 지속하려 해도 지도해 줄 스승이 없었다. 한 박사가 유학을 결심한 것도 깊이 있는 효소 연구를 위해서였다. 그는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에서 생물학으로 이학박사를 받고 미네소타대학 화학과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효소 기작에 대해 연구하면서 당시 최첨단 분야인 생명공학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1974년 유치과학자로 귀국한 그는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응용생화학 연구실의 책임자로 연구를 시작했다. 귀국 후 한 박사는 생명과학 기초연구보다는 바이오산업 발전을 위한 응용연구에 주력하였다. 당시 국내 기술개발 시책이 수입대채 국산화에 집중돼 있었기 때문인데, 연구비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이슈가 큰 연구 주제를 선택해야 했다. 마침 전량 수입되던 국제 원당 값이 올라 국내 설탕 값이 치솟으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었다. 그때 그의 연구를 취재한 기자가 ‘전분으로 설탕을 만들 수 있다’는 기사를 보도했고, 이를 본 과학기술처가 그에게 연구비를 지원하면서 대체제 연구가 시작됐다. 그는 10개월간의 연구 끝에 대체 감미료인 이성화당(인조꿀)을 생산하는 효소공정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고, 이를 기반으로 전분당 산업 분야 발전을 이끌었다. 효소공정의 산업화 과정에서 ㈜럭키 및 선일포도당을 비롯한 여러 업체가 산업화에 참여해 좋은 성과를 거뒀다. 1974년 10월 30일 발행된 한국식품과학회지 제6권 4호에 그의 연구 내용이 실렸다. 
[ Amylase를 사용하여 전분자원으로부터 maltodextrin 및 포도당 액당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감미도와 기능적 특성이 다른 감미료를 생산할 수 있으며, 다방면으로 식품공정에 이용되고 있다. 근래에 와서 개발된 glucose isomerase의 산업적 이용은 감미료가 설탕에 비해 떨어지는 포도당을 이성화시켜 과당을 생성함으로써 감미료를 설탕과 대등하게 높일 수 있게 되어 앞으로 설탕 대체 감미료로 쓰일 수 있는 경제적인 감미자원임을 강조하고져 한다. ]두 번째 연구 성과도 국산화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항결핵 항생제 리파암피신의 중간 원료인 ‘3-포밀 리파마이신 SV’을 전량 수입해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가격이 kg당 700~900달러로 상당히 비쌌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결핵 환자들에게 보급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 박사는 여러 단계의 생물학적, 화학적 공정을 통해 리파마이신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일차 원료인 ‘리파마이신 B’를 발효생산하고, 이를 ‘3-포밀 리파마이신 SV’로 화학 전환하는 기술을 국내 기술진의 힘으로 해낸 것이다. 여기서 개발한 리파암피신 원료 생산기술을 기반으로 국내 바이오벤처기업 제1호인 유한화학(주)가 창업했고, 환자들은 항생제를 보급 받을 수 있게 됐다.당시 개발의 어려움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국민보건에 관계된 연구여서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겠다는 각오를 했으나, 당시 국내에 기반기술이 없어 전공정을 하나에서 열까지 우리가 개발해 내야 하는 어려움이 컸고, 연구원들도 기술적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 무척 고생을 했다. 특히 정제가 잘 안되어서 고심을 많이 했는데 외국제품에서 힌트를 얻어 결국 성공하게 됐다. 돌이켜 보면 이 항결핵제의 생산공정 개발과정에서 새로운 기술적 돌파구를 찾기 위한 수많은 고비(죽음의 계곡)가 있었으나 이러한 난관을 모두 극복하고 의약 원료의 국산화를 성공시킨 좋은 사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사이언스타임즈, [과학기술계 원로와의 대화] 한문희 초대 생명공학연구원장(4), 2013.10.14.)
국산화 연구개발을 연이어 성공해낸 한 박사는 국내 생물학 분야 연구가 전반적으로 침체돼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대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미 그는 전 세계적으로 유전자재조합기술이 확장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1980년대 5차 경제개발계획 수립과 함께 과학기술정책이 준비되고 마련될 무렵, 한 박사는 정부 경제개발계획에 생물학 분야가 기여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관계자에게 피력하고 정책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가 바로 “생명과학과 생물공업기술의 육성을 위한 연구개발계획수립에 관한 연구”(1981)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이후 과기처가 국내 생물학 분야 육성 계획을 세울 때 마다 인용하는 기본 자료가 됐다. 이를 기반으로 생명공학 분야가 처음으로 정부의 주요 정책의제에 포함될 수 있었고, 유전공학육성법(현 생명공학육성법) 제정 및 유전공학센터(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설립이 가능할 수 있었다. 또한, 유전공학육성법에 근거해 수립된 ‘생명공학육성기본계획(바이오텍 2000, 1994~2007)’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그는 유전공학센터의 초대 소장으로 유전공학기술의 연구개발 역량강화 및 기술 확산에 이바지하며 우리나라 생명공학 연구의 기반 구축에 기여했다.  한 박사가 초대 소장으로 취임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예산 확보였다. 당장 실험에 필요한 기본 장치들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초기 연구개발을 위한 장비 구입비 500만 달러와 추가 자금 등을 차관사업으로 지원받아 연구 인프라를 구축했다. 유전공학센터는 설립 5년 후 1990년 대덕연구단지 내 신축청사로 이전한 후, 1995년 생명공학연구소로 명칭을 변경했다. 현재의 한국생명공학연구원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2001년이다.88서울올림픽 기간 중에는 도핑컨트롤센터 소장을 역임하며 99종의 약물분석기술을 확립하고, 베타-차단제 및 이뇨제 분석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해 약물검사 지원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도 했다. 그가 개발한 기술은 정밀 물질분석기술의 국내 연구 역량 강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그의 노력 덕분에 도핑컨트롤센터는 1987년 국제공인시험에 합격하며 세계적으로 15번째 국제공인센터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역대 올림픽에서 수행한 금기약물 분석방법이나 결과에 대하여 참고할 만한 기록이나 자료도 없는 상태였죠. 자체적으로 분석기술을 개발하자는 목표를 설정하고, 전문 기술이력을 확보하고 분석장비를 구축해 나가는 방식으로 독자적 기술역량을 확립했습니다.”(한림원과의 인터뷰에서)한 박사는 연구 인프라 저변 확대를 위한 학회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특히 기술 산업화를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바이오 관련 기업들의 개발 역량 강화를 위해 한국바이오벤처협회를 창립했고, 2011년에는 한국바이오벤처협회, 한국생명공학연구조합, 한국생물산업협회를 통합하여 창립한 한국바이오협회 발족에 힘을 보탰다. 바이오를 기반으로 한 융합기술 개발에도 관심을 가졌던 그는 한국의공학회, 한국바이오정보학회 등의 창립에도 앞장서며 생명공학 기술의 산업화 촉진에 기여했다. 이밖에도 2000년 바이오기업인 프로테오젠(주)를 창업하여 생명산업 일선에서 첨단 BT기술 개발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학문적 성과를 이룩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다수의 논문과 특허, 저서를 통해 알 수 있다. 효소공학, 응용미생물학 등 생명공학 분야에서만 150여 편에 달하는 학술 논문을 발표했고, 국내외 특허 50여 개를 획득했다. 이외에도 ‘산업사회의 발전과 생명과학의 역할’ 등 90여 편의 기술동향 총설논문 또는 정책기고문을 발표하는 등 생명과학 연구개발 육성을 위한 정책도출과 기술 확산에 큰 역할을 했다. “젊은 연구자들이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미래에 대한 비전으로 큰 그림을 그리고 도전해 나가길 바랍니다.”
한문희 박사의 인생은 ‘도전’으로 집약된다. 치밀한 전략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그는 늘 하고자 하는 일에 집념을 가지고 승부를 건 삶을 살아왔다. 그의 끊임없는 노력 덕분에 대한민국 생명공학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며 미래를 맞이할 수 있었다. 미수(米壽)인 현재도 그의 학문적 열정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다. 우리나라 유전공학 육성을 선도한 공로로 대한민국 과학기술상을 수상하고, 부상으로 받은 상금을 기부해 젊은 과학자상을 제정한 그에게 과학기술유공자의 명예가 더해졌다. 한국 생명공학의 살아있는 역사는 지금도 계속 쓰여 지고 있는 중이다.